[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성금연탄생 100주년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성금연탄생 100주년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10.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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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春史)의 가락은 이렇게 이어졌다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춘사(春史) 성금연탄생 100주년기념 연주회 ‘소리길을 찾아서’가 열린다. (10. 28. 국립국악원 예악당) 지난 20세기 가야금산조의 대표 명인을 뽑는다면, 전반기는 심상건(沈相健, 1889~1965), 후반기는 성금연(成錦鳶, 1923~1986)이다. 성금연 산조의 뿌리는 안기옥(安基玉, 1894~ 1974)의 가락이다. 성금연은 인터뷰에서 ‘안기옥에게 산조 한바탕을 배워 잘한다고 칭찬받은 것이 이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동기’라도 술회했다. (1963. 5. 22 동아일보) 

성금연산조는 ‘국민산조’ 

1939년 5월 13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조선소리콩클’이 열렸다. 16명이 열띤 경연을 벌였다. 판소리가 가장 많았고, 고무(鼓舞)의 참가자는 2명이었다. 만 16세의 성금연은 최종 경연에서 가야금으로 유일하게 참가했다. 성금연 이전에도 가야금연주가가 있었으나, 이 때부터 성금연은 점차 가야금연주계에서 군계일학처럼 돋보이게 된다. 

해방 후, 성금연은 지영희(1909~1980)와 부부의 인연을 맺으면서, 방송과 공연이 더 많아졌다. 가야금산조 중에서 ‘성금연류’는 ‘가야금산조의 대명사’처럼 국민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요즘말로 한다면,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는 ‘국민산조’할 할 수 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1958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제83회 탄신일 축하행사 중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여러 명창명인들을 제치고 성금연이 당당하게 수상한 것이 증명을 한다. 

1950년대후반부터 1960년대에 결쳐서, 여러 교육 기관에서는 성금연류를 가르쳤다. 성금연은 KBS국악연구회, 국악예술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대에서 가야금을 지도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다. 서울대학교의 제자인 이재숙과 김정자을 비롯해서, 국악예술학교와 서라벌예대에서 길러낸 제자로 박미령, 김명신, 김수란, 김승희, 황병주, 권혁태 등을 들 수 있다. 

지성자와 지순자 

성금연의 가락을 제대로 이은 인물로는 단연 두 딸인 지성자와 지순자를 꼽아야 한다. 1963년 4월 20일,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성금연류를 연주한 지순자는 제 2회 신인예술상을 받았다. 성금연이 방송출연 등으로 제자를 가르칠 수 없을 때, 딸 지순자는 성금연댁 (종로구 봉익동 13번지)에서 성금연의 조교 역할을 했다. 

1965년 10월 2일, 지성자 (당시 한양여고 3학년)은 YMCA강당(종로2가)에서 독주회를 했다. 고등학생이 독주회를 하는 건 당시 매우 특이한 일이었고, 또한 성금연의 작품만으로 독주회를 개최한 것으로 관심을 끌었다. 지성자와 지순자의 연주 스타일은 꽤 다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성금연 가락 특유의 매력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과 방송활동으로 바빴던 성금연이기에, 정작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주회는 매우 늦었다.  1967년 10월 25일, 성금연 독주회가 당시 국립극장 (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린 이 독주회는 두 차례(3시, 7시)였는데, 한 번은 무대에서 연주를 하다가 가야금줄이 끊어졌다고 하다. 성금연은 이에 당황하지 않고 무대에서 줄을 이었고, 그 사이에 고수를 맡은 남편 지영희가 장구로 그 사이를 메꾼 일화는 유명하다.  

성금연산조는 1960년대에 정점이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지영희 성금연 부부가 하와이에 이주해서 거주(1973년)하게 되고, 지성자(일본)와 지순자(미국)가 해외에 거주하게 되었다. 

황병주와 옛소리가야금연구소

성금연 명인과 두 딸이 국내에 있지 않아서 안타깝지만, 그러함에도 성금연류는 국내에서 잘 전승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공(功)은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 황병주와 권혁태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둘인데, 하나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현,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원이란 점이고, 또 하나는 성금연명인에게 직접 가야금을 배운 남성 제자란 점이다. 

민간에서 성금연류를 중심으로 가야금을 가르친 주요한 곳으로 옛소리가야금연구소를 들 수 있다. 1969년 사설학원 형태로 가야금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71년엔 옛소리가야금연구소(중구 북창동 42의 3)는 황병주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가야금 강습이 이어졌다. 

황병주는 1972년에 가야금교본을 내 놓았는데, 성금연류에 바탕을 둔 악보집이다. 황병주가 대표 강사를 맡은 ‘옛소리가야금연구소’는 조선호텔 앞 용호빌딩 5층 또는 북창동 세븐칼라 사진관 5층으로 알려지면서,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를 배울 수 있는 주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황병주와 또 다른 강사들은 새벽반, 낮반, 저녁반으로 애호가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여기서 가야금을 가르친 사람은 꽤 많은데, 훗날 국립국악원 정악단에서 활동한 송인길도 그렇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