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김진걸류 <산조춤>의 진정한 후계자
[성기숙의 문화읽기]김진걸류 <산조춤>의 진정한 후계자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10.11 11: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흔히 신무용(新舞踊)은 예술지상주의 혹은 유미주의적 미감을 특성으로 꼽는다. 일제강점기 최승희, 조택원이 창출한 새로운 춤사조로서의 신무용은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한국의 주류 춤사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6.25 전쟁 이후 황무지에 처한 한국의 무용계를 재건한 무용가는 대부분 신무용 제2세대였다. 

김진걸(金振傑 1926~2008)은 신무용 제2세대 중 독창적 미감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무렵 춤에 입문했다. 1940년대 초반 일본무용가 요시키(吉木) 문하에서 현대무용을 배웠고, 조택원·장추화·이채옥 등을 거쳤다. 김진걸의 스승들은 현대무용으로 출발하여 신무용가로 일가를 이뤘다. 주지하듯,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활약한 신무용가 조택원은 도미(渡美)하였고, 장추화는 월북했다. 

스승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김진걸은 신진이었지만 중진의 포지션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959년 시공관에서 신무용적 미감이 짙은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초대 단원으로 발탁되어 후일 지도위원을 지냈다. 

해방이후 한국의 무용은 크게 무용연구소시대와 대학무용시대로 전개되었다. 김진걸은 두 영역의 경계를 넘나든 대표적 무용가라할 수 있다. 그는 1950,60년대 이른바 무용연구소시대를 선도했다. 그의 무용연구소는 전문적이고 체계화된 춤매소드를 가르친다는 소문에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약 20여년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다. 수제자 김숙자는 무용연구소를 거쳐 한성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했다. 스승 김진걸과 제자 김숙자가 교육자로서 한성대 무용과 교수로 함께 봉직한 셈이다.

김진걸과 무용평론가 조동화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6.25 전쟁 중 1.4후퇴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은 다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한다. 조동화는 당시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무용가 20여명을 모아 한국무용단을 결성하고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편입하여 서울을 떠난다. 그들이 탑승한 화물열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였고 경사길을 오르지 못해 멈춰섰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조동화는 열차에서 내려 걷기로 하고 단원들을 앞장서 인솔한다.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엔 콘사이스영어사전을 불살라 빛을 밝혀 죽음의 사선을 통과했음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훗날 김진걸은 자신이 6.25 전쟁 때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조동화 덕분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처럼 김진걸의 삶의 길목엔 늘 조동화가 버티고 서 있다. 그는 결정적 조력자로 김진걸 춤인생에 큰 도움을 줬다. 해방이후 두 사람이 동지애로 뭉쳐 황무지적 상황에 봉착한 무용계 재건에 앞장선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1976년 월간 무용전문지 『춤』지를 창간한 조동화는 대표적 문화지성으로 손꼽힌다.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한국의 춤평단 조성에 기여했다. 특히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춤의 사회적 인식 제고에 앞장섰다. 그중 하나가 무용인의 자발적 모금운동을 통해 춤 선구자의 춤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근대 신무용의 창시자인 조택원 춤비 및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 춤비 건립은 그 결과의 소산이다.     

2004년 4월 19일 안성 태평무전수관 앞마당에서 한성준 춤비 제막식이 열렸다. 월간 『춤』지 주도로 2000년 3월부터 13개월 동안 진행된 모금운동 결과 약 4천 여만원의 기금이 모아져 한성준 춤비가 세워졌다. 무용평론가 김태원의 사회로 성기숙의 경과보고 그리고 조병화의 헌시(獻詩), 김진걸의 헌무(獻舞)에 이어 마지막으로 오정숙의 헌창(獻唱)이 있었다.

김진걸 선생은 필자와도 남다른 인연이 있다. 김진걸 선생이 우는 모습을 서너 차례 지켜 봤다. 한성준 춤비 건립 제막식 후 동숭동 『춤』지에서 만났을 때 선생은 춤의 거목 한성준 춤비 제막식에서 춤을 춘 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여긴다고 감격에 겨워하시던 모습이 새롭다.

그로부터 몇 년후 김진걸 선생은 소장자료를 연낙재에 기증하겠다는 의견을 조동화 선생을 통해 전해왔다. 사당동 예술인마을에 있는 김진걸 선생댁에서 여럿날 자료를 정리해 트럭에 실고 옮겨오던 날 선생은 1층 현관 입구에 나와 조동화 선생과 필자를 전송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알기에 선생을 조명하는 일은 지금껏 미뤄지고 있다. 선생의 혼과 정신이 스며있는 연낙재로서는 보다 정성과 공력을 드려야 하기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김숙자로 승계된 김진걸류 <산조춤>의 미적 완결성

전 생애에 걸쳐 그가 남긴 작품 중 역작을 꼽으라면 바로 <산조춤>이다. 김진걸은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는 일 외에 직함을 맡은 것은 한국무용협회 이사장(1978~1985)이 유일했다.  그만큼 세속적인 직함엔 무심한 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1957년 첫 선을 보인 <산조춤> 정립은 늘 과제로 떠안고 사셨다, 1970년대 초반부터 가야금의 명인 성금련의 선율에 맞춰 산조춤 양식화 작업을 본격화한다. 1989년 출간된 『金振傑 散調춤 舞譜-내 마음의 흐름』(은하출판사)은 생애 전부를 쏟아 부은 결과의 산물로 손색이 없다. 

김진걸은 <산조춤>에서 ‘음악의 무용화’를 염두에 두고 삶의 희노애락을 춤사위에 담아냈다. 그는 자신의 <산조춤>을 미완성이라 여겼을 정도로 겸손하고 소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영원한 주제’로 여겼을 만큼 <산조춤>은 평생의 화두였다. 수도자적 자세로 일평생 <산조춤>을 췄으니 김진걸이 말하는 미완성이란, ‘완성 너머의 영원한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오늘날 김진걸 <산조춤>의 미적 완결성은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눈과 귀를 열고 오감을 날세워 관찰하건대, 그 주인공은 바로 김숙자가 아닐까 싶다. 1956년 14세때 서울 돈암동 김진걸무용연구소에 입문하여 스승과 첫 인연 맺은 그는 평생 곁에서 모시며 춤의 철학과 정신, 춤사위의 특성을 익히고 체화했다. 

일찍이 평자들은 김진걸의 <산조춤> 고유의 미감이 김숙자에게 승계되고 있음을 알아봤다. 평론가 이순열은 「보드라우면서도 격한 물결의 情感」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김숙자의 <산조춤>에 대해 “춤의 호흡과 내면기(內面技)에 충실한다”면서 “서두르지 않는 춤의 태도”(『춤』, 1981년 1월호) 그 진중함을 높이 샀다.

필자 또한 관련 평문을 남겼다. 「신무용 명작의 재발견-김숙자의 김진걸류 <내 마음의 흐름>」에서 가야금 선율을 타고 넘는 춤에서 정중동의 미학과 특유의 카리스마를 포착했고, 맺고 끊는 춤사위의 경계가 뚜렷하며 온화함 속에 시원시원한 직선의 묘미, 그리고 한국춤 어법에서는 드물게 어깨선과 얼굴 시선 처리의 명료함을 간파했다(『춤』, 2013년 5월호). 재론하건대, ‘오늘·여기’김진걸 <산조춤>의 진정한 후계자는 누굴까? 단연 김숙자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