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아이의 노래 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아이의 노래 Ⅰ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3.10.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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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노래: 이 제목은 욕조 속에 드러누워 미래의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경호 작가의 모습을 은유한 것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이경호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불, 1991년에 파리에 있는 세르지국립고등예술학교(D.N.S.E.P)와 디종에 있는 국립미술학교(D.N.A.P)를 졸업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기는 1987년부터 2000년까지다.

2000년에 귀국한 후, 이경호는 국내의 그 어떤 미디어 아트 작가보다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중 굵직한 것만 꼽아봐도 [미디어시티 서울], [광주비엔날레], [강원트리엔날레], [창원조각비엔날레], [전남수묵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세비아비엔날레], [세네갈비엔날레], [Z.K.M아시아현대미술제](독일) 등등 국내외의 주요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뿐만아니라 슬로베니아의 뉴블리아나 시티 갤러리를 비롯하여 타이페이 현대미술관, 상하이 두오룬미술관, 중국 사천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가졌고, [Tamarindo Art Wave Festival](코스타리카)을 비롯하여 [KIAF], [부산아트페어], [상하이아트페어] 등등 각종 아트페스티벌과 국제아트페어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Ⅱ.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경호는 학연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그의 장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소위 ‘S대’니 ‘H대’니 하는 학연과 인맥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그 반대급부로 학연과 계파를 초월하여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는 작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유난히 자유롭고 쾌활하며, 적극적인 이경호의 성격도 한 몫을 단단히 했겠지만, 운도 따라주었다. 가령 귀국 후 작업 초기인 2000년대 초반에 당시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독립큐레이터 고(故) 이원일(1960-2011)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상하이비엔날레], [세비아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독일의 [Z.K.M아시아현대미술제] 등에서 이원일 큐레이터와 호흡을 맞추는 가운데 이경호는 국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반에 형성된 미디어아티스트로서 이경호의 성가(聲價)는 상당 부분 이원일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한창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1세대 독립큐레이터였던 이원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이경호에게도 큰 충격이자 손실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작업 환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프랑스에서 상1)을 받고, 같은 해에 귀국했는데, 이때 갤러리세줄의 성주영 대표를 만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연줄이 없었는데 성 대표가 그 역할을 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설치‧미디어아트 작가를 전속으로 삼는 갤러리가 드물었는데, 성 대표가 개인전을 열어주고 천안의 정보통신부 건물에 설치작품을 넣는 등 큰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관계로 국내에 이렇다 할 인맥이 없었는데, 이용우, 이원일 선생 등 유명한 전시기획자들을 소개해 주어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지금도 성주영 사장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작가에게는 일의 터전으로 이끌어주는 매개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성주영 대표가 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경호는 달리는 말이 날개를 단 듯 국내외 미술계를 종횡무진(縱橫無盡) 정열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이 이 글의 서두에 열거한 국내외의 각종 비엔날레 등 대형 전시회거니와, 이경호는 그때부터 비로소 국제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Ⅲ.

그렇다면 이경호는 과연 어떤 작가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작가로서의 훈련과 초기 작업이 이루어진 프랑스 유학 시절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 질문은 오늘날 이경호가 보여주는, 풍부한 상상력이 낳은 다양한 설치‧미디어 작업과 퍼포먼스의 정체를 해명하는 작업과 연계된다. 과연 무엇이 그처럼 변화무쌍하고 삶에 뿌리박은 다양한 개념의 작품들을 낳게 한 것일까? 그 의식의 진원지는 과연 무엇일까?

이경호는 몸 전체가 예술가다. 오로지 예술만을 생각하고 예술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술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다음은 그의 회상.

“초등학교 4학년 때 장래 희망란에 ‘예술가’라고 적었다. 어릴 때부터 죽 예술 쪽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쪽 분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계기는 특별히 없었다. 미술로 상을 많이 받았고 잘 하는 걸 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싫어하셨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는 거라는 문구를 책에서 보고 아버지께 미대를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방면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그림 쪽으로 뭔가를 남기고 싶은 욕심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그 희망대로 이경호는 커서 작가가 되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유럽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로 가는 일이었다. 1987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디종과 파리에서 수학했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불어를 배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소통에 지장이 많았다. 그때 언어적 소통을 대신해 준 게 바로 예술이었다. 세계적인 예술가 올랑(Orlan)과의 만남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수였다.

 

<다음호에 이어서>


1) 1999년, 싸롱 드 죤 크레아시옹(50주년 기념 프랑스 파리 [싸롱 죤느 뺑트르]전 ‘Espace Paul Ricard’상 수상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