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의 장터이야기 73] 사물의 소리가 들리는 가을 장터
[정영신의 장터이야기 73] 사물의 소리가 들리는 가을 장터
  • 정영신
  • 승인 2023.10.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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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신의 장터이야기 73

 

2022 충남 서천장 Ⓒ정영신
2022 충남 서천장 Ⓒ정영신

 

참깨 두 봉지를 갖고 나온 박씨(80)가 땅바닥에 철푸덕 앉아있다.

아마도 빈자리가 있어 난전을 펼친듯하다.

빨간 모자 안에 얼굴을 감추고 하늘색 잠바를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갠 채 앉아있다.

코로나 이후, 장사가 안돼 물건을 많이 가져오지 않는다며

살포시 웃는 모습이 하얀 깨꽃 같다.

 

2022 충남 서천장 Ⓒ정영신
2022 충남 서천장 Ⓒ정영신

 

그런데 깨알들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날 불러 할매 앞에 앉힌다.

봉지 속에 들어있는 그네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호미로 자기를 아프게 했던 일,

비 오는 날이면 젖지 않게 옷을 입혀주던 일,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물을 주던 일 등,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할매 입이 귀까지 걸린다며

서운해하는 그네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993 전북 순창장 Ⓒ정영신
1993 전북 순창장 Ⓒ정영신

 

마치 내가 그네들과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다른 난전까지 기웃거린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그네들 옆에 머무르다 보면,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숨은 이야기가 보인다.

씨가 땅속에 내려가 뿌리를 내리고,

자연과 사람과 한 몸이 되어 공들여 키워낸 시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