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쇤베르크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Schönberg?)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쇤베르크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Schönberg?)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10.25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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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바꿔가려는 작은 노력을 누군가 하고 있는 한 함부로 희망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 김선우의 빨강 <소리쳐 불러본다>, 한겨레 2014. 11. 18.

시인의 한 마디가 따끔하다. 희망 없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 왔다. 실낱같은 희망도 찾기 힘든 요즘이지만, 그래도 시인의 말에 정신을 차려 본다.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클래식 음악은 죽었다”, 이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렸다. “스트라빈스키가 리듬을 파괴하고 쇤베르크가 조성을 해체하고 존 케이지가 악기를 내버리면서 현대 음악은 대중과 멀어져 왔다. 클래식 음악도 역사 속에서 태어나 진화하고 소멸하는 음악의 한 갈래일 뿐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음악일 뿐이다.” 

서양음악사를 이렇게 정리하는 게 옳다고 하더라도, “클랙식 음악은 죽었다”는 말은 무례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음악을 모색하며 소통하려고 애쓰는 음악가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창조하지 못한 주제에 다른 사람이 이룬 것을 모두 파괴하려 들다니, 무척 오만한 말이다.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1912)를 들어보자. 21편의 시로 된 이 작품은 “달에 취해 눈으로 들이키는 술”을 노래하며 시작, ‘그 시절 옛 향기’에 취하여 축복받은 해방을 꿈꾸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시는 7편씩 세 묶음으로 돼 있다. 첫 부분은 사랑 · 섹스 · 종교를, 둘째 부분은 폭력 · 범죄 · 신성모독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부분은 고향 베르가모에 대한 그리움과 귀향을 노래한다. 

쇤베르크 <달에 홀린 피에로> (Pierro Lunair)

 

이 작품은 역설로 가득하다. 피에로는 영웅이지만 바보이며, 남자 캐릭터지만 여자가 연기한다. 기악 연주자들은 솔로인 동시에 오케스트라며, 보이스(Voice)는 노래인 동시에 연설이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시도했고, “언젠가 평범한 사람들이 내 음악을 흥얼거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구스타프 말러는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했는데, 그 예언은 실현됐다. 그의 교향곡은 이제 베토벤만큼 자주 연주되며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운명은 달라 보인다. 

역사 속의 음악은 그 시대에는 모두 ‘현대음악’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현대음악’은 발표하는 즉시 받아들여졌고, 좀 어렵더라도 얼마 뒤엔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100년전 음악을 ‘현대음악’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음악’이 ‘이해할 수 없는 음악’과 동의어가 돼 버린 불행한 시대 아닐까.  

조성음악의 해체를 ‘세기말’(fin de ciècl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엄밀히 말해 퇴폐와 허무주의의 ‘세기말’은 19세기말 하나뿐이었다. 모차르트가 활약하고 베토벤이 등장한 18세기말에는 새로운 시대가 동트고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세기말’의 우울과 피로와 염세주의가 유럽을 덮쳤다. 그리고 20세기, 나아진 게 있는가? ‘세기말’이 예고한 비극과 재앙, 두 차례의 제국주의 전쟁, 핵폭발과 생태 파괴가 인류를 강타하지 않았는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곡 2번 - 무조 음악의 첫 대표작 - 이 나온 게 1913년이었으니 1차 세계대전 전야였다. 현대음악의 선구자들은 어두운 시대를 예언한 ‘동굴 속의 카나리아’였을까? 이들이 추구한 음악의 혁신은 파국의 시대를 미리 보여준 파국의 음악 아니었을까? 이건용 선생이 <현대음악 강의>를 모차르트에서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대음악의 역사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차곡차곡 몰락해 온 역사가 아닐까?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음악의 선구자들은 불가능에 도전한 비극적 영웅들 아닐까? 

빙하에 부딪쳐 침몰하기 직전의 타이타닉처럼 세계 자본은 마지막 파국을 향해 매순간 질주하고 있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이 탄생한 지 100년이 흘러 21세기가 됐다. 그리고 우리는 100년 전 음악이 여전히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이상한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20세기의 모든 작곡가들이 새로운 음악을 모색했지만, 쇤베르크만큼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은 없었다. 쇤베르크의 치열한 고민에 공감하면 그를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를 제대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쇤베르크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Schönberg?)” 아직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