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조선춤방’의 춤들은 과연 실제하는가
[성기숙의 문화읽기]‘조선춤방’의 춤들은 과연 실제하는가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10.2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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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기획의 ‘조선춤방’, 아마추어적 발상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누구나 살면서 결정적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반추하건대, 필자는 1990년대 초반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실에 몸담았던 시절이 생애 결정적 순간으로 기억된다. 당시 전국의 전통춤꾼을 대상으로 “입춤 한량무 검무”등을 현장조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책에는 없는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에서 마주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근현대 우리 춤의 기원과 지역적 고유성 및 전승내력과 춤의 계보를 깨우치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조사대상자를 선정하는 것부터 공적(公的) 마인드로 접근했던 기억이 새롭다. 가령 전국의 시(市)·도(道)는 물론이요 군(郡) 단위까지 공문을 보내 광대, 창우, 기생 등 전통시대 악가무의 맥을 잇는 예인들을 추천받았다. 그 시절 무용계에 수면 위로 떠오른 몇 몇 명무 이외 혹여 누락될 수 있다는 우려에 소위 ‘그물망 검증’으로 조사대상자를 선정하는 등 치밀한 과정을 거쳤다. 조사대상자 선정에 그토록 ‘그물망 검증’을 한 것은 국가기관에서 추진하는 조사사업으로서 공적 의미와 더불어 신뢰성 담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89명의 전통춤꾼을 선정하여 약 4년간 전국 각지로 현장조사를 다녔다. 이후 몇 년간 보충조사를 통해 미진한 부분을 채웠다. 현장조사 내용은 두 권의 조사보고서와 무보집으로 묶여 나왔다.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9) 『입춤 한량무 검무』(1996),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20) 『舞譜集-입춤 한량무 검무』(1996) 등은 그 결과의 산물로 유의미한 기록이라 평가된다.    

30여 년 전의 옛 기억을 반추하는 무대가 열렸다. 필자의 ‘기억의 저장고’를 열게 한 무대는 국립국악원이 주최한 “일이관지(一以貫之): 조선춤방”(2023년 10월 17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공연이었다. 당시 현장조사를 통해 만났던 예인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춤의 명인들이 ‘조선춤방’이라 이름 붙은 무대로 소환되어 관객을 맞는다.

우선 진주지역 교방춤의 명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수악(金壽岳 1925~2009)이 첫 순서로 우리 앞에 섰다. 김수악 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 현지조사차 진주를 오가며 깊은 교감을 나눴던 필자로서는 이번 무대가 더없이 반가웠고, 또 한편으론 몹시 당혹스러웠다.

주지하듯, 김수악은 전통악가무를 섭렵한 최고의 예인으로 교방-권번의 전통을 표상하는 대표적 인물로 손색이 없다. 생전의 김수악은 춤뿐만 아니라 외모와 옷차림에서 교방-권번의 엄격한 법통을 준수하여 깊은 인상을 안겨줬다. 정수리를 기준으로 곧게 뻗은 앞가리마는 실로 압권이었다. 동백기름으로 단장한 반듯하고 정갈한 비녀머리, 흰색 모시적삼의 우아하고 단아한 한복차림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기품과 도도함의 기운을 풍겼다. 기방 특유의 법도로서 자존감과 꼿꼿함의 상징으로 비춰졌다. 

김수악은 겨우 여덞 살 무렵 진주권번에 적을 뒀다. 부친 김종욱이 터주는 길을 따라 정통 예인의 법도를 걸었다. 부친 김종욱은 ‘양반광대’라 불릴 정도로 거문고, 피리, 해금, 젓대 등 여러 악기에 두루 능통했다. 가야금과 거문고의 명인 숙부 김종기를 비롯 동편제 소리꾼으로 명성이 있었던 유성준은 그의 외삼촌이었다. 혈통을 타고 흐르는 기예의 우월한 유전자는 그가 전통예인으로 우뚝 서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   

후천적 노력도 이에 못지 않다. 하동 쌍계사를 비롯 합천 해인사,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등 유명 사찰을 찾아 소리공부에 매진하여 경지에 이르렀음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타고난 목청과 이른바 절공부를 통해 터득한 구음솜씨는 실로 탁월했다. 그의 구음은 장고장단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춤을 지도할 때 유용한 교습법의 하나로 통용되었다.

근래 김수악의 구음에 맞춘 이른바 <구음검무(口音劍舞)>라 이름붙인 검무가 추어지고 있음은 이런 배경에 착안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수악의 여러 문하생 중 한 명인 김경란이 만든 <구음검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춤사위에 김수악의 구음을 얹어 새롭게 만든 춤이라하기엔 작위성이 도를 넘고 있다. 

한편, <굿거리 초무(初舞> 역시 같은 지점에서 의문이 증폭된다. 주최측은 공연팸플릿에서 <굿거리 초무>에 대해 김수악의 굿거리춤을 고제(古制)로 구음과 장단에 맞춰 기본춤 형식으로 만들어 이번 무대에 초연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번 무대에서 초연된, 엄밀히 말해 자기화된 감수성으로 창작된 전통춤을 소위 ‘조선춤방’이라는 타이틀로 선뵈는 무모한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조선후기 진주목사 정현석이 저술한 『교방가요』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는 교방의 풍류문화가 짙게 배인 유서 깊은 고장으로 손꼽힌다. 김수악은 진주의 교방-권번 전통을 대변하는 대표적 춤꾼으로 손색이 없다.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지정 당시 최연소 나이에 보유자로 낙점된 된 것에서 증명된다. 또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국가무형문화재에 이어 지방무형문화재 두 종목의 보유자가 된 것은 김수악이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무임에 틀림없다. 

2009년 김수악 사후(死後) <진주교방굿거리춤>은 보유자 또는 전승교육사가 부재한 가운데 이수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그중 서울교방의 주인장 김경란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춤꾼에 속한다. 김경란이 선보인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자유롭고 활력 있고 흥과 신명이 넘쳐난다. 춤의 구성이나 움직임 문법에서 옛 교방 혹은 권번의 춤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김경란 내면에 집적된 미적 감수성의 기원에서 찾아진다. 그는 20대 청년기에 문화운동의 두 축을 이룬 탈춤과 마당극을 접하며 시대정신에 눈을 떴다. 또 일찍이 우리 춤의 문화원형이 굿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간파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의 춤에서 무아의 경지에서 발현되는 엑시터시의 징후 또는 흥과 신명의 마당정신 및 특유의 해학성이 엿보이는 것은 이러한 내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경란 춤에 내재된 공연미학 혹은 미적 고유성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롭다. 문제는  ‘김수악 진주교방굿거리춤’이라 내걸고 춤출 때 김수악 춤의 미적 고유성 내지 춤의 질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김경란이 추는 <진주교방굿거리춤>은 그가 오늘의 감성으로 재현한 혹은 재구성한 전통춤 내지 자기 해석이 개입된 창조물로서의 전통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표방하는 가치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춤의 내용이 상충될 때 주최측의 기획의도는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주최측 국립국악원에 따르면, ‘조선춤방’은 1876년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1960년대까지 권번, 사설국악원, 고전무용학원 등에서 전승된 17개 춤방의 레퍼토리를 모아 무대에 올렸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춤방’이 담고자하는 시대의 상한선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한선으로 설정한 1960년대는 봉건전통의 조선이 아닌,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 자유민주체제의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결론적으로 전제부터 틀렸다. 7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립국악원의 아마추어적 기획 발상이 실망스럽다. ‘조선춤방’의 춤들은 과연 실제하는가? 에릭 홉스봄이 주장한 이른바 ‘만들어진 전통’ 개념이 새삼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