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성능경 작가, 예술 아닌 것을 예술로 만드는 예술행각
[Special Interview] 성능경 작가, 예술 아닌 것을 예술로 만드는 예술행각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바울 사진기자
  • 승인 2023.10.25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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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아닌 길 위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한 개념의 덩어리를 만드는 망친 예술”
“어디서 본 듯한 예술 안했고, 한물 간 듯한 예술 안했다”
올해 이어진 전시 제목, 내 예술관 관통
70년대 군사정권 향한 고등방정식 같은 저항 「신문읽기」
올해 잇따른 전시 회고전 성격, 내년 미발표작 선보일 듯
LA해머미술관서 단체전 이어 뉴욕 리만머핀 개인전 예정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바울 사진기자]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 《제4회 앙데팡당》전에 첫 선을 보인 성능경의 <신문읽기> 퍼포먼스는 1974년 <신문:1974. 6. 1 이후>를 원전으로 가지고 있다. 1974년 《제3회 ST전》에서 성 작가는 일주일동안 매일 전시장을 찾아 그날 발행된 신문의 기사를 오려내고, 사진과 광고만 남은 신문의 뼈대를 전시했다.

▲성능경 <즉흥 퍼포먼스: 두루마리 휴지>  ⓒ김바울 사진 기자

성 작가는 자신의 그 행위는 당시 군사정권을 향한 아주 작은 모기소리 같은 저항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모기소리 같은 외침이 40여년이 지난 지금, 30명과 함께 하는 외침(자하미술관 《개념의 덩어리-성능경의 예술행각》展 <신문읽기> 퍼포먼스/2023.5.19.)으로, 외국인까지 함께한 100인의 외침(갤러리현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展 100인과 함께하는 <신문읽기> 퍼포먼스/2023.9.6.)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성 작가는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80세 원로 작가’로 꼽힌다. 지난달 6일 키아프, 프리즈가 열리는 주간에 성 작가는 고덕동에 위치한 라이트룸에서 스페인, 독일, 베트남, 중국 국적의 주한외국인도 함께 참여한 100인의 <신문읽기> 퍼포먼스를 열었다. 항상 한국미술계의 비주류에 있었던 그가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순간이었다.

성 작가를 향한 갑작스러운 주목에 다들 이유를 궁금해 한다. 성 작가는 그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구겐하임의 효과고, 내가 살아온 길의 보상 같은 것이지 않겠느냐고 답한다. 마치 그 답은 ‘살아오다보니, 흘러오다보니’라는 대답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의 답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오다보니’라는 말 앞에 ‘뚝심 있게 한 우물만 판 예술가 성능경으로’라는 말이 붙으면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지난 달 25일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현대에서 성능경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기자를 만나고, 특별히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전시장을 모두 돌면서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축문낭송(부채질) 퍼포먼스에 사용했던 불에 탄 부채 작품 앞에서는 실제 퍼포먼스를 하듯 아주 단단한 목소리로 당시의 축문을 읽었다. 성 작가가 지닌 목소리의 힘 때문에 몸이 저릿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그 에너지는 변함없었다. 3시간에 달해가는 긴 시간이었음에도 성 작가는 단 한 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는 2020년부터 매일 제작해 온 신작 <밑그림>(매일 아침 대변을 보고 난 휴지를 스마트 폰으로 촬영하고, 이를 폰 카메라 앱 프로그램으로 컬러링 한 작품. 성 작가는 이를 생리미술, 피지올로지컬((Physiological) 예술이라고 명명함) 앞에서 퍼포먼스와도 같은 사진 촬영에도 응했다. 그곳에 80세 원로 작가는 없었다. 지금 시대와 조응하고 있는 한 명의 예술가가 있었다.

기자는 <신문 읽기> 작업을 마주할 때, 매일 아침마다 발행된 신문을 들고 전시장으로 달려가 전날 전시했던 신문은 투명색 박스에 집어넣고, 당일 발행된 신문의 기사 부분을 오려서 파란색 박스에 분리수거해 넣었을 30대의 성능경 작가를 상상하곤 한다. 그는 여백을 만들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만약 내가 그 시대 속 인물이었다면 나는 그 작품을 어떻게 마주했을까 생각한다. 1시간의 전시투어, 2시간의 인터뷰에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1974년 성능경이 처음 만들었던 신문의 여백을 지금으로 잇고, 또 그 여백을 하제(성작가가 ‘내일’을 칭하는 단어, ‘오늘’의 다음날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까지 도달하고자 했다. 성능경의 어제, 오늘, 하제를 만나본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시 도록에 사인을 남기고 있는 성능경 작가의 모습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시 도록에 사인을 남기고 있는 성능경 작가의 모습 ⓒ김바울 사진 기자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1991년 대구 삼덕갤러리의 첫 개인전 이후 세 번의 개인전이 있었다. 올해 들어 갤러리 현대를 비롯해 세 번의 개인전이 한꺼번에 열리게 됐는데, 이는 30여 년간의 전시 횟수와 맞먹는다. 특별히 올해 이렇게 많은 개인전을 열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세속적으로는 구겐하임의 효과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언급되다보니,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되풀이해서 거론하게 되고, 그런 영향들이 이어진 것 같다. 그래서 ‘왜 내가 관심의 대상이 됐을까’하고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평생 한 우물만 파면서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보상이지 않을까 싶다. 올해 내가 우리나라 나이로 팔십인데, 팔십이 다 돼서 그런 보상체계 속에 내가 들어가지 않게 됐나 싶다.

개인전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구겐하임, LA해머미술관의 기획전도 많이 열려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 같은데. 이렇게 많은 전시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

지금은 아르코 미술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2001년에 열었던 개인전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성능경 전》은 회고전 형식으로 구성됐었다. 신작도 있긴 했지만, 과거에 했던 작품을 중심으로 기획된 전시였다. 올해 선보이게 된 백아트, 자하미술관, 갤러리 현대의 전시는 2001년의 전시를 분할해서 선보인 것과 같다. 세 번의 개인전 역시 회고전 형식의 전시였다. 이번에도 각 갤러리마다 신작을 하나씩 선보이긴 했지만, 전시의 중심 줄기는 모두 옛날 작업을 근간으로 두고 있다.

이번 갤러리 현대에서 선보이고 있는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은 미니 회고전 형식을 띠고 있다. 작가의 작품 세계가 잘 담겼는가.

전시 기획은 모두 갤러리에 일임했다. 절대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개입을 하면서 ‘이 작품을 여기 걸자, 저기 걸자’라고 얘기하는 순간 전시는 난장판이 된다. 그리고 내가 전시에 개입을 전혀 안함으로써, 내가 죽었을 때 내 예술이 어떻게 전시될지 미리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전시’는 ‘전시’의 전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 갤러리마다 미술전문가가 있다. 그들에게 맡기고, 그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현장> 작업이 42번 째 설치다. 1979년에 <현장 1>을 했고, 내가 38번 째 <현장>까지는 개입을 했다. 이후 세 번의 작업은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 내 의도가 섞이지 않고, 내가 모르는 <현장>의 작업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1985년에 관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도, 나는 설치 드로잉만 해서 미술관에 전달하고, 설치는 미술관에서 진행한 적이 있었다. 붙이는 사람 마음대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작품이 어떻게 완성될지 정말 궁금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비롯해서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전시를 보고 있으면, 나는 최상의 대접을 받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기획하는 내 전시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됐다. 그리고 내 기획이 잘 담기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망친 예술이 되는 거고, 그 또한 예술인 것이다.

항상 자신을 논 프로핏(non profit)ㆍ논 파퓰러(non popular)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간 상업 미술 시장에서 성능경 작가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달라졌다. 작가로서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논 프로핏(non profit)ㆍ논 파퓰러(non popular) 작가’라는 말은 2000년대 초 이탈 작가가 인천에서 열었던 세미나 현장에서 처음 쓴 말이었다. 그때 나를 소개하면서 ‘논 프로핏(non profit)ㆍ논 파퓰러(non popular)’라고 칭했는데, 그게 참 괜찮은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살아오면서 항상 논 프로핏하고, 논 캐피탈리즘(non capitalism)적인 작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본의 힘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모든 것을 자본화시키고, 그것을 당해낼 자가 없는 것 같다. 자본이 모든 것을 녹여내고 있다. 나도 이제 자본에 녹여지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뭐, 할 수 없이 내가 녹여지고 있구나 싶다. 자본의 물결은 마치 쓰나미 같다.

매춘부라는 단어가 영어로 프로스티튜트(prostitute)다. 이게 사전에서 첫 번째 뜻은 매춘부, 창녀인데, 두 번째 뜻은 예술가가 예술심을 버리고 작품을 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즉 돈에 끌려가 돈에 영혼을 팔고 작품을 하는 사람들이 ‘프로스티튜트(prostitute)’라는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나는 돈에 내 영혼을 팔지 않았다. 과거에 내가 했던 예술이 지금에 와서야, 돈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싶다. 돈을 바라고 예술 행위를 하는 것과 돈을 생각하지 않고 예술행위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본다. 마치 지금 자본이 예술을 잠식하는 양상은 이클립스와도 같다. 달이 해를 먹어가고 있다.

▲갤러리현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장에서 작품설명을 전하고 있는 성능경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큰 수익이 없었음에도, 1968년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1971년 이후 81년에서 84년 사이에는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이 없었다. 아예 작품 요청이 없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계속 퍼포먼스만 해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퍼포먼스 작가인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2017년에 들어서서야 자하미술관에서 내게 신작발표를 요구했는데 그때부터 내가 쌓아뒀던 아이디어를 하나씩 꺼내서 선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먹여 살렸다. 아버지가 돈을 꽤 잘 버시고, 성실한 분이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성년이 되고 36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성년이 되고 장가들기 전까지는 내 형과 형수가 나를 먹여 살려줬다. 그리고 79년에 장가를 들고 나선 우리 집사람이 지금까지 나를 먹여 살렸다.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나를 뒷바라지 한 것이다.

우리 집사람은 뭔가, 참을성도 아주 많고 너그럽고 ‘여성’이라기보다 한 명의 ‘인간’같은 사람이다. 옛날로 치면 ‘군자’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내가 가끔 가다 집사람에게 얘기를 하곤 한다. “당신은 군자 같다. 군자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그래서 덕분에 내가 여태까지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웃음).

29년의 교직 생활을 했다. 전위적인 예술을 하는 작가와 교단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 두 개를 어떻게 병행해 왔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예술고등학교는 입시 미술을 하는 곳이다. 예술 교육은 없고, 아주 살벌한 곳이다. 나는 강사 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입시미술의 부적격자이기도 했다. 학교의 배려가 없었으면 나는 아마 이미 오래 전에 쫓겨났을 것이다.

내가 가르친 교과목의 이름은 ‘상징소묘’였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상징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개념이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그리게끔 지도했다. 입시 이외의 교육을 제공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가 입시 시스템 이외에 별도의 그런 영역을 제공했다는 것이 바람직했다고 느껴진다.

당시 계원예고의 교육을 관장하시던 분이 전숙희 수필가의 따님인 강은엽 조각가였다. 미국 유학 생활도 하고, 서울대에서 조각도 전공하면서 굉장히 열린 시각을 가진 분이었다. 그 분이 당시 계원예고에 예술연구소라는 것을 만들고, 예술연구소장을 하면서 학교 교육을 전반적으로 컨트롤하고 있었기에 나의 그런 교육 행위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성능경의 대표적인 작업으로 <신문 읽기>가 있다. 당시 70년대 군사정권 아래에서 이런 작업을 이어온 것은 ‘반항’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반항’이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 격렬한 단어다. 나는 ‘저항’과 ‘반항’을 고등방정식의 방법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강렬하고 직설적인 외침보다는, 컨셉츄얼(conceptual)한 개념적인 방식의 표현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군부에 발각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잡혀가지 않았던 것이라고 본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다. 왜 그때 더 격렬하게 외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신문 읽기>에서 신문을 오리는 행위는 모기소리같이 가느다란 행위였다. 모기소리의 외침을 이어왔기 때문에 조금 아쉽고, 부끄럽기도 하다. 잡혀가서 얻어맞고 나왔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잡혀갔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진 못할 것 같다.

1974년에 <신문:1974. 6. 1 이후> 전시를 진행할 때, 매일 매일 신문을 새롭게 교체했다. 아침 일찍 신문을 하나 들고, 주위에 색안경 쓴 사람이 있나 없나 살펴보고, 신문을 교체했다. 혹시나 누가 올까봐 빨리빨리 오리니까 정교하게 오리진 못하고, 대충대충 정리하고 나왔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어떤 사람이 내 오른쪽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신분증을 탁 내밀었다. 그 순간 올게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경향신문의 기자였다. 자기가 신문쟁이로서 이렇게 신문을 오린다는 것은 너무 충격적이라면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는데, 그때는 그게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다. 만약 그때 인터뷰를 진하게 했더라면, 지금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다.

▲갤러리현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장에서 작품설명을 전하고 있는 성능경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2010년대 이후 제작한 <그날그날 영어>, <손씻기>, <밑그림> 은 일상과 예술의 틈새 속에서 발생된 작업들이다. 작가는 예술성을 상실한 때 시장에서 거품만 내뿜는 예술을 치유하고자, 아직 예술이 아닌 것들을 찾아 나서서 이것을 예술에 편입한다고 했다. 일상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그 내용은 내 글 ‘아직 예술 아닌 것-아무것도 아닌 것’에 담긴 내용일 것이다. 그 글을 이번 백아트 전시에서 다시 언급했다. 백아트의 전시 제목은 《아무 것도 아닌 듯…성능경의 예술 행각》이었다. 개념미술론자들의 말을 빌린다면 이미 예술인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미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예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개념미술가들이 예술을 바라보는 아주 기본적인 태도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조금 바꿔서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소재를 찾아서 예술화 시키고자 했다.

예를 든다면, 일상이라고 하는 건 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퍼포먼스로 하고,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태를 예술화 시키는 것은 비미술적이고, 반예술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것이 내 기본 태도다. 내 그런 태도와 생각을 표현한 것이 지난 5월 달에 자하미술관에서 선보였던 《개념의 덩어리-성능경의 예술행각》이었다. 그리고 이번 갤러리현대에서 선보이고 있는 《성능경의 망친 예술행각》이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망친 예술’을 만듦으로써, 예술 아닌 것을 예술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뉴욕 리만 머핀에서 준비하고 있는 전시의 타이틀이 《off the beaten track(오프 더 비턴 트랙)》이다. ‘beaten track’은 잘 밟아 다져진 길, 보통의 방법이라는 뜻으로 해석 된다. 즉 ‘off the beaten track’이라는 제목을 한글로 번역하면 잘 다져진 길을 벗어나는, ‘길 아닌 길 위에서’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내 작업은 길 위에서 예술을 구하는 것이 아니나, 길이 아닌 곳에서 예술을 구하는 것이다. 결국 ‘off the beaten track’이 내 기본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일관성을 갖고 예술 행위를 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나오고 보니, 모든 전시들이 하나의 맥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 것도 아닌 듯(as if it's nothing)’-‘개념의 덩어리(chunk of concept)’-‘망친 예술행각(botched art)’, 그리고 ‘길 아닌 길 위에서(off the beaten track)’까지 하나의 경로를 택해서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이나 개념적인 면에서는 좀 우왕좌왕하고 산만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 예술의 스펙트럼은 넓고, 내 개념적인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모두 다 예술화하겠다는 욕심이 있다. 그래서 작품에서는 산만한 경향이 있지만, 어떤 이들에겐 내가 항상 새로운 것을 하고 똑같은 것을 안했기 때문에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지점이었지 않을까 한다.

▲갤러리현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장에서 작품설명을 하며, 퍼포먼스의 일부분은 들려주는 성능경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성능경에게 있어서 미술에서 물질성을 없애는 것은 중요한 관점이었다. 이런 지점이 신문, 사진, 행위 같은 소재를 택하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을까.

73년도에 군대를 제대하고 나니 미술계가 입체미술로 난리가 나 있었다. 71년도부터 한 2~3년간 아주 정점을 찍었던 미술이다. 일본의 모노파(もの派/物派), 이우환 선생 같은 분들이 돌, 유리, 철판 등 물성을 통해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려 했다. 나도 그때 군대 제대를 하고 《제 2회 ST전》에 참여해서 <상태성>이라는 입체미술 작품을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입체미술론자들이 쓰는 관계항, 신체항 이런 단어들을 알 수 없었다. 조셉 코수스의 글 ‘철학 이후의 미술’을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그 또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리고 74년에 ‘개념미술’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제 3회 ST전》을 열었다.

입체미술은 탈장르적이고, 탈회화적, 탈조각적 장르를 통칭하는 언어다. 서양에서 시작된 언어를 참 잘 번역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입체미술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보면 ‘입체미술’이라는 말이 일본의 언어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입체미술’이 참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는 열등감에서 우리는 그 언어를 지우고 있다. 그런 것에 대한 반항 심리가 내 안에 싹 텄던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럼 나는 물질성에 대한 저항으로 물질성을 빼 봐야겠다”였다. 그리고 개념미술을 이해하게 되면서, 개념미술 안에 ‘탈물질’이라는 개념언어가 나오는데 그것을 구현해보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입체미술에서 탈물질화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까지 도달했고, 거기서 ‘신문’을 찾게 됐다. 돌, 거울, 유리 이런 어마 무시한 것들이 물질이지 70년 대 그 당시에 ‘신문 한 장’은 물질이 아니었다. ‘신문지’라면 물질일 수 있겠지만, ‘신문 한 장’은 물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문’이라는 것은 정보체다. 나는 ‘신문지’라는 물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라는 정보체를 다루겠다는 것이다. 시작은 탈물질화 하는 방법으로 ‘신문’을 택하게 됐지만, 그 이후 ‘아무 것도 아닌 듯’한 비물질적인 것을 내 예술 속에 가져왔고, 그렇게 이 일이 내 평생의 일거리가 됐다.

1970년대의 전위를 이끌었던 그룹에 속했다. 2023년 지금 ‘전위’는 어떤 위치일까.

전위는 이미 자본의 힘에 잠식됐고, 없어졌다. ‘전위’라는 말 자체가 없어지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여전히 전위적 정신을 필요하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한국미술계에서 80년대에 들어서면 민중미술이 나오고 그 파워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전위적 관점의 예술이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80년대 말부터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이 나오면서, 90년대에 이르러선 아방가르드적 관점이 많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그런 개념으로써, 그 안에서 전위가 조금씩 침식당하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200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가 큰 의미가 있다. 다 죽은 한국 아방가르드를 살려낸 첫 전시였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없었던 일이 되는데, 이렇게 전시로 묶는 순간 사건화되고 역사화 된다.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준 전시였다. 그 전시 현장에 가보니, 요즘 MZ세대라고 하는 그런 젊은 세대들이 많이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이나 중년이 아닌 그런 MZ세대가 이런 실험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이 상당히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앞으로도 이런 전시, 이런 실험 미술이 필요하다는 기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갤러리현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2층 전시장에서 생각에 잠긴 성능경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올해는 전시가 거의 다 결정된 것 같다. 내년 이후의 전시계획도 궁금하다.

지금 구겐하임에서 하고 있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가 LA해머미술관에서도 이어진다고 했다. 리만 머핀 전시가 있고, 조그마한 전시들은 계속 될 것 같다. 그런데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내년은 아마 미발표작으로 가야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올해는 회고전 성격이 강했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최근 패션화보를 찍기도 했다. 이제 성능경에게 ‘패션’도 하나의 퍼포먼스일까.

새로운 경험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여튼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이다. 갈 때까지 가봐야, 또 반성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어떤 작가이고 싶은가.

아무것도 아닌 듯한 것, off the beaten track(오프 더 비턴 트랙)에서. 길 아닌 길 위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한 개념의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망친 예술을 주장한다. 그건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 전시 타이틀은 다 연관성이 있었다. 같은 소리이지만 뉘앙스의 변화를 주면서 내 예술을 계속 진행시켜 왔고, 아마 하제(내일)도 그럴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에서 못 다한 말이 있다면.

항상 인터뷰를 하면, 마지막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때마다 항상 “없다, 전혀 없다”라고 말한다.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일이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태도로 예술을 해왔는지 다. 나는 어디서 본 듯한 예술은 안 했고, 한물 간 듯한 예술은 안했다. 그것을 했을 뿐이다. 이것이 나한테는 도움이 됐지만,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강요를 하면 폭력이 된다. 앞으로의 일은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