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연금술과 박상남의 그림들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연금술과 박상남의 그림들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3.11.1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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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색 기미를 띠면서 새색씨 볼에 발그레 화색이 돌듯 하는데 나는 이러한 변화가 좋다
▲윤진섭 미술평론가

1.

철학자 스피노자는 거리에서 안경알을 닦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심오한 철학은 이처럼 소박한 직업의 산물이다.

화가 박상남 역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린다. 남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길거리 바닥을 소재로 단순한 추상화를 그린다. 얼핏보면 단색화 같지만 단색화 특유의 좁은 색역 보다는 스펙트럼이 조금 더 넓다.

보도란 무엇인가? 쉽게 비유하자면 맛있게 먹은 음식물의 찌꺼기들이 모이는 부엌의 싱크대와 같은 곳이 아닌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며 쓰레기도 버리고 껌이나 침도 뱉는다. 어디 그뿐이랴? 반려견의 똥이 보이기도 하고 몰지각한 취객들이 한 밤중에 노상방뇨를 하기도 한다. 이 모두는 프랑스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용어를 빌면 애브젝션, 즉 똥이나 오줌, 고름처럼 험하고 비천한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귀엽거나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여인, 근육질의 잘 다듬어진 남성의 몸, 귀여운 강아지나 아기들, 꽃이나 수석, 화려한 색깔의 물고기 등등. 그러나 현존재로서의 사람이나 동식물, 그리고 사물들의 지금 모습은 단지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이든 죽음이나 소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동식물이 죽으면 썩거나 시든다. 돌이나 쇠 같은 광물이나 금속조차 세월이 가면 점차 사라지거나 다른 형태의 물질로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은 경고했다. 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박상남 작가 작품 (사진=윤진섭 제공)

2.

박상남의 연금술적인 추상화는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명상의 결과물이다. 그는 생계를 위해 간혹 들르는 손님들에게 커피나 와인, 스파게티를 대접하고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코로나19로 손님이 뜸한 요즘에는 그만큼 작업시간이 늘었지만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예술이 가난한 마음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속설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은 가난해져봐야 절실해진다. 궁즉통이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박상남의 연금술은 주어진 조건에서 재료에 절실했던 가난한 마음의 산물이다. 그는 누에가 뽕을 먹고 아름다운 명주실을 뽑아내듯 가난한 절실함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의 생존의 기반이지만 천대받는 길거리를 늘 관찰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비천을 고귀로 바꾸는 연금술적인 작업을 천직으로 삼는다. 그에게 복이 내리면 좋겠다. 그래서 아픈 부인이 건강을 회복하고 아들이 무난히 대학에 합격하면 참으로 기쁠 것이다.

<카페 옆에> 겸 박상남의 작은 작업실을 다녀와서 몇 자 쓰다.

▲박상남 작가 작품 (사진=윤진섭 제공)

3.

위 글은 작년 1월 초에 화가 박상남의 작업실 겸 일터인 《카페옆에》를 다녀와서 쓴 글이다. 그는 지금도 한 해 전과 다름없이 작업을 하며 이따금씩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한다. 말하자면 일 속에 작업 있고 작업 속에 일이 있는 격이다. 이를 일러 양수겸장이라 하던가. 그렇다. 박상남은 굳이 이 둘을 구분하려들지 않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의 작품의 소재가 되는 길바닥이야말로 사람들이 딛고 서 있는 존재의 지반이기 때문이다. 박상남은 오랜 기간에 걸쳐 길에 대해 사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대상을 정신적 가치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거리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매일 길거리에서 안경알을 갈았듯 매일 카페에 나와 캔버스와 씨름을 한다. 그리고 궁리와 사색을 한다. 그 궁리와 사색은 주로 물질과 관련된 것이다. 그림은 물질을 떠나 존립할 수 없음으로 물질을 다루는 그는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오로지 나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제작하느냐 하는 게 관심사이다. 박상남의 작품이 연금술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물질을 다루는 박상남의 이같은 태도에 기인한다.

박상남이 그림에 무슨 재료를 사용하는가 궁금해서 적어달랬더니 거의 A4 한 장 분량에 가까웠다. 간략히 요약하면 캔버스 천을 비롯하여 온갖 종이류, 광물류, 접착제류, 기름류, 알콜류 등등 다양하다. 그것들을 어떻게 섞고 갈고 다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현장의 상황에 달린 문제라 작가 자신도 잘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상남은 원조 곰탕집의 여든 살 자신 주인장 할머니를 닮았다.

손주 며느리가 달이는 가마솥으로 다가 간 할머니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곰탕 국물을 국자로 조금 퍼서 맛을 본다. 됐다! 한 마디면 끝난 것이다. 이게 바로 전기 단색화의 요체다.

▲박상남 작가 작품 (사진=윤진섭 제공)

4.

그림이 언제 끝나느냐? 오직 작가의 마음 만이 알 뿐이다. 조금 못 미치거나 반대로 조금 넘치면 실패로 돌아가는 이 경지!

박상남은 이 경지를 잘 알고 있다.

나는 그가 현재 어떤 경지에 도달했는지 잘 모른다. 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도 짐작할 수 없다. 요즘 들어 박상남의 작품이 유채색 기미를 띠면서 새색씨 볼에 발그레 화색이 돌듯 하는데 나는 이러한 변화가 좋다. 아무래도 집에 화사한 봄기운이 도는가 보다. 카페가 잘 되나? 혹시 블루칩 작가의 조짐이 있는 건 아닌가? 별별 공상을 다 하면서 다시 그의 그림을 바라보니, 언젠가 썼듯이 혹시 박상남이 추상의 박수근 아녀?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