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신무용 명작 ‘가사호접’의 예맥
[성기숙의 문화읽기]신무용 명작 ‘가사호접’의 예맥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11.15 11: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통의 현대화’의 전형, 김충한의 예술행보 주목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주지하듯, 조택원이 안무한 <가사호접(袈裟胡蝶)>(1933)은 한국 근대무용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전통을 현대화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조택원은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 후, 귀국하여 김백옥이라는 기생을 찾아가 전통 <승무>를 직접 사사하고 이를 새로운 무대어법으로 변용하여 <가사호접>을 창작했다. 머리에 고깔을 쓰고 가사를 착용한 것은 전통 <승무>와 동일하지만, 작곡된 서양음악을 사용하고 직선적 움직임에 강한 엑센트를 가미한 과감한 표현은 당대 대중의 심미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가사호접>은 작곡된 최초의 무용음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무용사상 최초의 무용음악 작곡인 조택원 안무의 <가사호접>은 연희전문 재학 중이던 김준영(金駿永)이 작곡했다. 전통시대 국악 반주에 의존하던 무용공연에서 근대 극장 예술춤에 걸맞은 본격 서양음악 작곡으로 이루어진 창작곡을 사용함으로써 순수 예술춤의 진화를 견인한 대표적 신무용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조택원은 <가사호접> 창작동기에 대해 「나의 춤 반세기의 영욕」이라는 제목으로 월간 『춤』 1976년 3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광대나 기생들이 추는 <승무>를 여러 번 보았는데 너무 잡스럽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웃으면서 추기도 하였다. 형편없다는 분개심을 가졌다. 이것이 예술이 되려면 우선 자존심을 가져야 하고 나의 생각, 나의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대로의 해석을 붙여 창작한 것이 <승무의 인상>이었다. 이것이 나의 창작무용 1호이기도 하다. 이 춤을 보고 시인 정지용은 <승무의 인상>이라는 이름보다는 <가사호접>이라는 이름이 더 좋겠다고 했다. 운치와 함축성을 가진 정지용의 시인다운 명명에 나는 만족했고, 그래서 그 이후 작품명을 <가사호접>으로 바꾸었다. 그때는 조선무용이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나의 창작무용은 신무용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신무용은 옛날 춤을 현대화한 의미로 쓰여졌다. 나는 한국의 옛날 춤을 그대로 춘 것이 아니라, 내 사상으로 거르고 재구성했다.” 

1933년 초연 때 <승무의 인상>이라 불렸던 이 작품은 조택원의 휘문고보 1년 선배이자 그의 가정교사였던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개칭되었다. 조택원의 <승무의 인상>을 관람한 정지용은 ‘大男子의 大僧舞’라고 격찬했으며, 후에 춤의 제목을 <가사호접>으로 바꿔줬다고 한다. 

휘문고보 선배로 조택원의 정신적 동지였던 정지용은 6.25전쟁 때 조택원의 아들 병문(昞文)을 데리고 월북했다고 전한다. 조택원은 1973년 무용가로서 살아온 일생을 정리한 자서전을 집필하고 정지용이 이름지어준 작품 『가사호접』을 책제목으로 사용했다. 둘 사이가 어느 정도의 친분이었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조택원의 창작무용 제1호 <가사호접>은 1938년 프랑스 파리에서도 공연되었다. 당시 <가사호접>은 세계적 안무가이자 파리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인 세르주 리파로부터 크게 호평 받았다. 전통의 현대화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가사호접>은 1976년 조택원의 제자 송범에 의해 선보인 이래 여러 무용가들에 의해 추어지고 있다. 

신무용 명작 <가사호접>의 미학적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무용가는 누굴까? 단연 김충한이 손꼽힌다. 조택원의 아내이자 제자였던 김문숙 선생은 <가사호접> 원작에 담지된 본래의 미감을 밀도 있게 표현한 김충한을 무척 총애했다.

말년의 김문숙 선생은 남편이기 이전 신무용의 대가이자 우리 춤의 선구자인 조택원 선생의 신무용 명작이 후대로 온전히 계승될 수 있을지 우려했다. 조택원 후계자의 온전한 안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에 대해 몹시 아쉬워했다. 팔자를 만날때면 늘 근대 남성춤의 표상인 조택원의 예술은 김충한에게 승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사심이 없는 순수한 믿음과 신뢰의 발로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마음으로 여겼다. 

김충한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중견 남성춤꾼으로 손색이 없다. 세종대에서 명무 정재만을 사사한 그는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지는 내포제 전통춤 예맥의 정점에서 우리 춤의 어법과 문법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그가 추는 한영숙류 전통춤은 스승 정재만의 춤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으로 우리 춤 고유의 미감이 온전히 투영돼 있다.

알다시피, 정재만은 한성준에서 한영숙 계보는 잇는 당대 최고의 춤꾼으로 명성이 있었다. 1998년 문체부 지정 “이달의 문화인물-한성준” 지정 때 벽사춤아카데미 주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한성준을 발굴하여 세상에 드러내는데 일조한 필자 또한 당시 학술세미나에 참가하여 “한국근대무용사에 있어 한성준의 위치”라는 논문을 발제했다. 

일제강점기 한 시대를 풍미한 신무용은 전통춤을 자양분으로 당대의 창조성을 가미하여 탄생된 춤사조이다. 1970년대 중반 대두된 한국창작춤은 전통춤과 신무용의 전통을 토대로 당대의 창조성을 투영한 결과의 산물로 읽힌다. 우리시대의 한성준 혹은 조택원의 예술정신을 이어갈 무용가는 과연 누굴까? 전통춤과 신무용 그리고 한국창작춤을 관통하면서 우리 춤 고유의 어법과 공연문법을 체득한 김충한의 예술행보를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