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기계’로 세상을 구한 ‘사람’의 이야기, 연극 <튜링머신>
[공연리뷰]‘기계’로 세상을 구한 ‘사람’의 이야기, 연극 <튜링머신>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11.27 0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명의 배우가 3주간 채운 4면 무대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에니그마(Enigma)를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며, 상업용 암호 기계를 개량해 만든 암호 생성 장치 ‘에니그마’를 도입한다. 이 기계는 설정하는 암호 규칙에 따라 매번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알파벳이 26개씩 적힌 톱니바퀴가 3개만 연결돼 있어도 조합이 가능한 경우의 수는 모두 1만 7576(26x26x26) 가지나 된다. 앨런 튜링은 매일 자정이 되면 변경되는 코드키를 가진 독일의 복잡한 암호 매커니즘 ‘에니그마’를 해독한 인물이다. 현대에서는 인공지능(AI)의 개념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기계가 인공지능을 갖추었는지 판별하는 실험인 ‘튜링 테스트’를 최초로 고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앨런 튜링 役 고상호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여 지난 25일 막을 내린 연극 <튜링머신>은 프랑스 작가이자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브누아 솔레스(Benoit Solès)의 작품으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전기를 다뤘다. 어렸을 때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던 앨런 튜링은 대학 시절, 체스 챔피언이자 영국 정보암호학교 책임자인 휴 알렉산더와 라디오 제조 공장으로 등록된 보안 공간에서 간신히 암호를 풀어내지만, 종전 후 민간인으로 복귀했음에도 전쟁과 관련된 핵심 보안 사항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한다. 오랜 기간 비밀정보부의 감시를 받은 튜링은 어느 날 집에 강도가 들어 해당 사건을 신고한다. 작품은 로스 형사가 강도 사건 조사를 위해 그를 처음으로 취조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미카엘 로스 役 이승주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수사 중 튜링의 강연에 참석한 믹 로스 형사는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와 마주한다. 이는 앨런 튜링이 1950년 발표한 ‘컴퓨팅 기계와 지능’에서 제기한 매우 유명한 질문이지만, 이 작품에선 튜링의 천재성과 내면의 고뇌를 동시에 조명하는 장치가 된다. 튜링은 “어떤 것이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야 할까’라고 되묻는다. 단순한 강연 내용처럼 보이지만, 이것의 함의는 그의 정체성인 ‘동성애’와 연결된다. 인습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느냐고 튜링은 객석의 관객에게 묻는다. 에니그마를 박살 냈던 튜링의 기계는, 극 중 그의 죽은 첫사랑의 이름을 딴 ‘크리스토퍼’로 불린다. 천재적 발견으로 세상을 구했지만 침묵해야만 했던 앨런 튜링과 크리스토퍼(동성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튜링머신>은 고상호와 이승주 단 두 명의 배우가 원 캐스트로 채운 공연이다. 앨런 튜링 역의 고상호는 극의 서술자로 이야기를 이끄는 동시에, 앨런 튜링으로서 그의 삶과 고뇌를 객석에 전달했다. 고상호는 튜링의 천재성과 순수함, 고독과 유머를 곳곳에 자연스레 녹이며 인물을 표현했다. 사랑하는 존재들에 대하여 함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윙크를 보내는 앨런 튜링의 모습은 고상호의 세심한 연기로 인해 더욱 묵직하게 기억된다.

배우 이승주는 수사관 믹 로스, 체스 챔피언 휴 알렉산더 그리고 튜링의 동성 연인 아놀드 머레이 등 세 가지 인물을 번갈아 연기했다. 극장을 압도하는 성량과 냉철한 말투의 로스 형사로 튜링을 매섭게 취조하다가도 금세 취한 듯 움직이며 튜링의 지갑에 손을 대는 연인 머레이로 변신하고, 잠시 후엔 다시 튜링의 동료로서 그와 함께 암호 해독에 열중한다. 1분 남짓한 퀵 체인지 시간 동안, 이승주는 완벽하게 다른 캐릭터를 입고 등장해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의상뿐만 아니라 말투, 목소리, 걸음걸이까지 다르게 표현하며 앨런 튜링의 외로운 삶에 다양함을 더했다.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4면이 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의 가운데 놓인 원형 테이블이 이 작품의 메인 스테이지다. 무대의 특성상 어느 곳에 앉아도 볼 수 없는 표정이 생기고, 역으로 특정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도 있다. 이는 평생 ‘미치광이’와 ‘천재’라는 평가를 수없이 오갔던 튜링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튜링이기에 진지함이 없는 태도를 비난할 수 있겠으나, 그의 표정을 마주한다면 내면의 고독을 읽어낼 수 있다. 

▲연극 <튜링머신> 무대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튜링머신> 무대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무대 구석 곳곳에는 튜링의 삶을 상징하는 오브제들이 놓여있다. ‘미치광이 비숍(Bishop)’으로 불리며 절대 혼자선 ‘체크메이트’를 외칠 수 없는 게임을 홀로 해냈지만, 그의 대각선 방향에는 그가 사랑한 것들이 늘 함께했다. 아울러, 달리고 있는 튜링의 심장박동 그리고 윙크하는 눈의 깜빡임을 시각ㆍ청각적으로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 조명과 음악은 전체적 연출과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며 완성도를 더했다. <튜링머신>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모니터 위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튜링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