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판소리’로 전한 항우와 우희의 비극,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공연리뷰]‘판소리’로 전한 항우와 우희의 비극,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11.29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극 품은 창극, 대극장으로 무대 옮겨 웅장함 더해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패왕별희(覇王別姬). 초나라 패왕(霸王) 항우(项羽)와 그의 연인 우희(虞姬)가 이별한다는 뜻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경극과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한나라 유방의 계략에 빠져 초나라를 빼앗기고 시름에 잠긴 항우의 곁에는 우희만이 남는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패왕을 바라보던 우희는 결국 자결을 택한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은 지난 11일부터 18일까지 동명 경극을 원작으로 하는 창극 <패왕별희>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였다. 2019년 4월 초연과 11월 재공연 이후 4년 만의 무대였다. <패왕별희>는 창극이 지닌 포용성과 유연함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중국 경극은 분장부터 깃발 개수, 배우의 걸음걸이, 손끝 떨림에도 상징적인 의미를 담는 예술로, 시각적이며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다. 반면, 판소리의 창과 아니리, 악기의 합주로 이루어지는 음악 중심의 창극은 청각적이고 유연성이 돋보였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창극 <패왕별희>는 중국 춘추시대 초패왕 항우가 한나라 황제 유방에게 패하는 과정과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총 2막 7장에 걸쳐 그렸다. 창극에만 등장하는 도창(해설자) 격인 맹인 노파의 구슬픈 소리가 시작을 알리고, 중국 역사를 잘 모르는 한국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세히 풀어낸 2장 ‘홍문연’에선 항우와 유방의 책사들이 판소리로 무대를 가득 채운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악기 연주의 힘을 덜어내, 각 캐릭터가 전하는 소리와 그들의 성격이 더욱 부각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심면매복’은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 확장된 만큼 병사 수를 늘리고, 초·한 양국 병사들의 화려한 깃발 군무와 전투 장면을 보강했다. 비파와 철현금 대신 생황과 태평소·대아쟁 등을 편성했다. 타악기 구성에도 변화를 줘 완성도를 높였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총 7장의 공연 중 백미는 단연 6장 ‘패왕별희’ 장면이다. 김준수는 여성 캐릭터를 자연스레 표현하면서도 소리와 연기, 고난도 검무까지 완벽히 소화했다. 특히 쌍검무 장면은 목전의 비극을 잊을 만큼 아름다워, 객석의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우희를 부러 ‘여자처럼’ 연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손끝에 담아냈다. 더불어, 항우를 연기한 정보권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제대로 보여줬다. 고집불통 성격으로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마지막까지 비겁했던 항우지만, ‘패왕별희’에서 보인 정보권의 절절한 눈물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감정 동화를 이끌어냈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패왕별희(2023) 공연 장면 ⓒ국립극장

이와 더불어, 유태평양(장량)ㆍ김금미(맹인노파)ㆍ허종열(범증·아부)ㆍ최용석(한신)ㆍ이연주(여치) 등 초연 및 재연 배우들은 우리 소리는 물론, 경극의 몸짓까지 이질감 없이 보여주며 극에 안정감을 더했다.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의 진가는 경극과 창극의 아름다운 충돌에서 나온다. 부러 경극의 요소를 빼거나 창극을 억지로 과장하지 않는다. 시각적 요소들로 경극을 선보이고, 작품이 가지는 비극성을 우리의 애끓는 소리로 표현할 뿐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전 단원의 민요조 합창은 우리 민족만이 표현할 수 있는 구슬픈 화려함이다. 전란 이후 민초들의 고통까지 세심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는 경극을 품은 ‘창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