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샌프란시스코에서 찾은 보물,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샌프란시스코에서 찾은 보물,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11.29 1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보물과 같은 음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Duets with Spanish Guitar)를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돌아가신 누님이 모아놓은 LP 중에 이 앨범이 있었다. 그게 1972년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연주자들이 어떻게 이토록 멋진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지 늘 신비롭게 여겨졌다. 누나가 돌아가신 뒤 20년 동안 애지중지하며 듣곤 하던 이 음반은, 아뿔싸, 결혼 후 이사하던 중 곤돌라에서 LP 꾸러미가 떨어질 때 그 속에 있다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국내에서 구할 수도 없었고, 인터넷에서 찾을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샌프란시스코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저녁때 유니온 스퀘어 근처의 한 중고 레코드샵에 들렀다. 비틀즈, 레드 제플린, 스콜피온즈 같은 아티스트의 LP는 100달러가 넘는 경우도 많았지만 클래식 LP는 모두 ‘1달러 플랫’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클래식 음반을 별로 찾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헐값에 내놓은 게 분명했다. 웬 횡재냐, 눈에 불을 켜고 이것저것 고르던 중, 바로 이 음반, 40여년 전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가 눈에 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두말없이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선 나는 기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이 보물을 단돈 1달러에 가져가면서 얼마나 미안한 마음인지, 계산대의 순박한 미국 젊은이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로린도 알메이다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샌프란시스코의 중고 레코드점에서 이 보물을 찾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제일 기쁜 순간은 친구들과 함께 이 음반을 틀어놓고 한잔 홀짝이며 대화를 나눈 날이었다. 

기타는 수백년간 정통 클래식의 변두리에 머물렀지만 포크 음악인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기타는 독주 악기라기보다는 사람 목소리나 다른 악기의 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효과를 내곤 했다. 이 음반에서 로린도 알메이다(Laurindo Almeida, 1917~1995, 브라질 태생의 미국 기타리스트)는 메조 소프라노와 플루트를 파트너로 선정해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준다.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이 앨범에서 샐리 테리가 부른 노래들은 모두 브라질 전통에서 나온 곡들이다. 작곡자들이 브라질에 대해 느낀 사랑과 동질감을 표현한 노래들로, 브라질 민속음악의 리듬과 선율을 차용하고 있다. 발데미르 엔리케의 <부아 붐바>(링크 5:37)는 아프리카계 브라질 사람들의 전통 노래로, 성스런 소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파우리요 바로소의 <니냐르를 위하여>(링크 11:17)는 사랑스런 자장가로, 잠든 아기 곁에 다가 온 귀신을 쫓아내는 내용이다. 브라질의 대표적 작곡가인 에이토르 빌라-로보스(1887~1959)는 바흐 음악이 진실로 보편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브라질 풍의 바흐> 5번(링크 22:12)은 바흐의 음악 어법과 브라질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역작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할 것이다. 

샐리 테리(1922~1996, 영국 출신의 미국 성악가)의 목소리는 단정하면서 표정이 풍부하고, 관능적이면서 상쾌하다. 1958년에 발매된 이 음반은 이듬해인 1959년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최우수 녹음상을 받았고, 이 때 샐리 테리도 클래식 부문 최우수 가수 후보로 올랐다. 작곡가 빌라 로보스는 샐리가 부른 <브라질 풍의 바흐> 5번을 듣고 “음반으로 나온 이 곡의 연주 가운데 최고”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기타와 플루트의 듀엣들은 주로 프랑스 작곡가들의 매혹적인 선율을 듀엣으로 편곡한 것이다. 프랑수아 고세크(1734~1829)의 <탬버린>(링크 4:09)은 프로방스 지방의 춤곡이다. 기타의 몸통을 두드리면 탬버린 소리가 나는데, 이 특수 주법을 활용하여 흥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가브리엘 포레(1845~1924)의 <시칠리엔느>(링크 7:15)는 6/8박자로 된 시칠리아풍의 춤곡인데, 애수어린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해 주는 곡이다. 자크 이베르(1890~1962)는 에릭 사티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20세기 작곡가로, 특별히 사랑한 악기인 플루트를 위해 협주곡을 쓰기도 했다. 그의 <간주곡>(링크 19:01)은 17세기 프랑스 극장 음악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향기 높은 작품이다. 

쇼팽의 프렐류드 E단조(링크 31:35)는 원래 피아노 독주곡인데, 쇼팽이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파리 마들렌느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 때 오르간 솔로로 연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곡은 내겐 기타 반주, 플루트 독주의 구슬픈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이 음반이 남긴 강한 인상 때문이다. 

음반을 처음부터 들어보면 기타는 계속 앉아 있고 메조 소프라노와 플루트가 교대로 등장하여 한곡씩 번갈아 연주한다. 아늑한 살롱 음악회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