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하모니 스케이프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하모니 스케이프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3.11.2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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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제 시대의 명암
▲윤진섭 미술평론가

2023 평택시문화재단 큐레이터 초청전시 계획에 의거, 볼만한 기획전이 하나 떴다. 송탄에 위치한 평택북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하모니 스케이프](2023. 11. 20-12. 09)가 바로 그것. 화가 겸 독립큐레이터인 조혜경이 기획한 이 전시에는 김희곤, 박근용, 배달래, 은진표, 이지송 등 회화, 조각, 건축,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 다섯 명이 초대되었다.

전시장이 있는 문화예술회관의 현관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드넓은 로비 공간이 나왔다. 로비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가자 대극장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뒤로 컴컴한 대극장 실내의 저 멀리 스크린에서 한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 흰 천 위에 검정색 물감을 열심히 뿌리는 모습이 보였다. 행위예술가 배달래의 퍼포먼스 기록 영상이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로비로 나오자 시선을 잡아 끄는 대형 그림들이 건물 중앙 현관의 2층 벽면에 가득 걸려 있다. 3백호에서 1천호에 달하는 배달래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 그림들은 페인팅 퍼포먼스의 결과물로서 흑백 단색조에서 울긋불긋한 다양한 색의 물감들이 흩뿌려지고 뒤엉켜 이루어진 액션 페인팅의 잔재다. 한 마디로 작가의 응축된 기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색의 조화를 이룬 수작들이었다.

3층의 드넓은 전시장에는 김희곤, 박근용, 이지송의 작품들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잘 포진돼 있었다.

▲평택북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하모니 스케이프] 전시 전경 (사진=윤진섭 제공) 

설치미술의 성격상 자칫 어지러워 보일 수 있는 전시장의 중심을 잘 잡아준 것은 건축가인 은진표의 디스플레이 컨셉트 <Wallscape> 였다. 설계의 핵심은 반원형의 긴 전시공간의 중앙을 대담하게 반으로 자른 뒤 길이 23미터의 스텐리스 앵글 구조체로 전체를 길게 가로 지른 공간 분할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산만해 보일 소지가 있는 곡면의 공간에 통일감을 부여한 것이다.

이 중앙에 설치된 긴 형태의 가벽에는 중간 중간에 네모난 창들이 많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두꺼운 투명비닐 위에 다양한 색상의 투명 물감들을 흘리거나 뿌린 이지송 작가의 즉흥성이 강한 추상화 작품들이 설치되었다. 이지송의 <사랑의 낙서>는 영상과 회화의 혼합물이다. '부라보 콘' 광고 감독으로 유명한 이지송은 은퇴후 회화에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원래의 전공인 화가로 복귀했다. 그는 개인전을 갖는 등 지금도 맹렬히 항진 중이다.

▲평택북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하모니 스케이프] 전시 전경 (사진=윤진섭 제공) 

버려진 네온 광고판을 수집해서 자신의 작품으로 가공하는 박근용의 설치 작업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내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의미하듯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전시장에 풑어있을 때 그것은 다른 말을 하게 된다. 특히 송탄이란 지역이 오랫동안 미공군부대가 주둔해온 지역이다 보니 그것이 풍기는 문화적, 정치적 함의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박근용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오브제 하나에도 세심한 눈길을 주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가벽의 빈 공간은 관객들의 몫이었다. 전시장을 둘러본 관객들은 제공된 유성 칼라펜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드로잉이나 낙서를 한다. 현대미술이 좋은 점은 관객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작품을 바라만보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때로는 창작자의 입장으로 변신한다. 사운드가 흐르는 가운데 벌어지는 이지송의 이번 작업은 영상, 사운드, 드로잉이 어울려 관객의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한 성공작이다.

▲평택북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하모니 스케이프] 전시 전경 (사진=윤진섭 제공) 

관객이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맨 먼저 김희곤의 설치작품을 접하게 된다. 김희곤이 이번 전시를 위해 변신을 시도하고 나섰다. 천정에 걸린 작품 중 일부가 회전하는 키네틱 아트의 기법을 도입, 활력을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단조로워지기 쉬운 설치에 변화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김희곤은 오랜 기간 인체 형상을 한 철판을 구기거나 때로는 두들기고 무수한 구멍을 뚫어 형해화한 인간을 표출해내는데 주력해 왔다.이 특유의 조형어법은 이번 전시에서도 지켜지고 있으나 원색의 사이키데릭 조명이 더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전시를 축하하는 개막공연으로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김윤정과 이번 전시의 초대작가인 배달래의 합동 춤이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검정색 의상을 걸친 두 사람은 은진표의 긴 설치 구조물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즉흥에 가까운 춤 동작을 보이면서 서서히 접근, 중앙에 이르자 서로 몸을 부딪히며 확인하는 비교적 단순한 플롯의 작품이었다.

▲평택북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하모니 스케이프] 전시 전경 (사진=윤진섭 제공) 

배달래의 그림을 그리는듯한,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춤동작은 아마도 화가의 삶을 은유한 것이리라. 거기에 덧붙여 무용계가 주는 여러 상이 의미하듯 노련한 중견무용수이자 안무가인 김윤정의 존재가 더욱 빛을 발해 오프닝 세레모니가 더욱 돋보였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90년대 초반 이후 이 땅의 허다한 지 자체들은 그동안 마치 문화예술에 허기가 진듯 무수한 축제를 양산해 왔다. 광주비엔날레를 시발로 수십 개의 비엔날레와 기백 개의 아트페어가 범람하고 있는 현재 문제는 과연 그것들이 내실이 있고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속빈 강정이니 그 밥에 그 나물이란 바로 우리의 축제 문화에 대한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남과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획력의 확보가 관건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한 차에 조혜경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의미심장한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