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서울경기춤포럼과 한성준춤 바로알기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서울경기춤포럼과 한성준춤 바로알기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11.2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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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2023 서울경기춤페스타’(11. 17 ~ 19, 강동아트센터)의 부대행사로 ‘서울경기춤포럼’이 열렸다. 여기서 나는 “한성준의 춤 레퍼토리 연구 : 1938년 부민관 공연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한성준의 춤에 관한 평론적 해석이 더해진 내용을 발표했다. 그간 한성준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과 한성준의 춤작품이 특징을 밝혀내고자 했다. 

한성준은 피리연주가 

한성준(1875~1941)은 명무이자 명고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그는 뛰어난 피리 연주자였다. 평택에서 주로 활동했던 한성준은 서울에 진출해 경성방송국(JODK) 악사로 활동한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다수 출연했는데, 고수를 하기도 했지만, 피리를 불기도 했다. 당시 피를 세적(細笛)이라 불렀다. 한성준은 주로 방용현(대금) 김덕진(해금), 이일선(장구)과 함께 팀을 이뤘다. 

한성준이 매우 허물없이 지낸 인물로 지용구(1857~1939)가 있다. 한성준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 지용구라면, 한성준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지영희(1909~1980)이다. 지용구는 한성준과 지영희를 사제의 인연으로 맺게 해 준 인물이다. 한성준은 지영희에게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조교 역할을 부여했다. 경기도 굿판에서 활동한 지영희는 이미 피리를 잘 불었지만, 무용음악에 필요한 피리는 한성준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1940년대 초반부터, 지영희는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방송활동과 공연활동을 하는 팀을 결성하게 되고, 무용반주를 함께 하게 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해방 이전 한성준’과 ‘해방 이후 지영희’는 매우 닮은 꼴임을 알 수 있다. 

한성준 – 한희종 - 한영숙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 한희종(韓喜宗). 한성준의 친자(親子)이자 한영숙의 친부(親父)로, 조선성악연구회에서도 활동했다. 한희종과 지영희는 매우 가까웠다. 둘 다 피리와 장단에 출중한 인물이었다. 

1940년에 들어서면, 조선성악연구회와 조선음악무용연구소가 조금씩 바뀌게 된다. 조선성악연구회를 있게 한 명창이 타계하거나 은퇴를 한다.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도 한성준의 영향이 줄어든다. 그의 문하에 이강선, 장홍심, 권오봉에 있었지만, 한성준은 손녀인 한영숙에게 많은 기대를 걸게 된다. 한성준의 외부활동이 줄어들 때, 한희종과 지영희는 정해시(해금)와 한 팀을 이뤄서 방송에 출연했다. 당시 ‘경기가요’로 불린 곡들은, 훗날 춤반주곡으로 그대로 이어진 레퍼토리다. 국악계나 무용계나 1940년대와 한희종에 대해서는 별반 얘기를 안 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게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보다 깊게 살펴보고 정확하게 자리매김할 게 많다. 

악사는 춤을 알아야, 춤꾼은 음악을 알아야 

한성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연은 1938년에 이뤄졌다. 5월 2일과 6월 23일, 각각 12개와 14개의 춤 레퍼토리가 무대에 올려졌다. 한성준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레퍼토리는 아쉽게도 그의 대(代)에서 전승이 끊어진 레퍼토리가 많다.

전승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한성준이 이끈 단체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그 이름처럼, 두 장르를 두루 알아야 하며, 그것이 밀접하게 연결고리를 이루면서 작품이 탄생되는 방식이다. 춤을 무대에 올림에 있어서, 음악과 춤이 매우 긴밀하기에 그렇다. 악사는 춤을 알아야 하고, 춤꾼은 음악을 알아야 한다. 

가야금병창의 레퍼토리를 춤으로 만든 ‘단가무’,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져와서 코믹한 춤으로 엮은 ‘군로사령무’, 삼일유가(三日遊街)의 전통을 재현한 ‘급제무’는 삼현육각이나 남도잡가 ‘성주풀이’를 잘 알아야 한다. 농악을 최초로 무대화시킨 공연이 6월에 펼쳐졌는데, 한성준이 뛰어난 놀이꾼들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성준은 춤꾼 또는 안무가라는 명칭보다는 연출가라는 역할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이름처럼 음악과 무용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무대에서 생음악으로 연주했다. 그러나 한성준의 건강 악화와 타계와 함께, 이런 ‘무용과 음악이 상보하고 합일하는 작품’의 계보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맞다. 한성준의 레퍼토리 중에서, 음악에 보다 비중을 두고 만든 작품이 전승되지 못한 사실이 증명한다. 한성준춤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가 바로 ‘연극성’과 ‘회화성’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후일을 기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