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오페라 ,서울오페라앙상블 '붉은자화상', 또 보고 싶은 수작
창작 오페라 ,서울오페라앙상블 '붉은자화상', 또 보고 싶은 수작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담 객원기자, <모차르트 평전> 저자
  • 승인 2023.12.0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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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성과 대중성 동시에 확보한 고태암의 음악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잘 녹여 낸 김민정의 대본
관객에게 더 큰 감동 선사하려면 일부 개선할 여지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모차르트 평전>저자

고태암 작곡 <붉은 자화상>(예술감독 장수동)으로 우리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갖춘 창작 오페라를 한 편 더 갖게 됐다. 시대와 불화한 천재 화가 윤두서의 이야기, 막이 오르자 “어둡고 무거운 작품일 거”라는 편견은 사라졌다. 우리 전통음악의 농현을 닮은 현의 글리산도와 트레몰로는 아늑했다. 해남 녹우당에 내리는 눈을 묘사한 그래픽은 매혹적이었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오페라의 무대인 조선 숙종 시대로 이동했다. 윤두서가 자기 그림의 한계를 한탄하는 첫 아리아를 부를 때 화면에 그의 여러 그림이 펼쳐지며 오페라의 핵심 화두인 <자화상>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11월 29일과 30일 저녁, 서울 강동아트센터. <붉은 자화상>이 6년만에 다시 관객을 만났다. 2017년 초연됐는데 이번엔 드라마를 좀 더 긴박하게 다듬고 음악을 대폭 손질했다고 했다. 초연을 못 보아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목표는 충분히 이뤄졌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드라마는 이렇다 할 군더더기가 없었고, 음악은 현대 어법을 구사하면서도 주요 아리아에 예술가곡의 서정성을 가미하여 청중들에게 무리 없이 다가왔다. 윤두서(바리톤 장철, 장성일)의 분장은 <자화상>의 모습과 닮아서 자연스러웠고, 장면마다 세련된 세트, 조명, 그래픽으로 감상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오케스트라 피트를 갖춘 강동아트센터 대극장은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16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프라임 필하모닉 단원들, 현악 7명과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 트럼펫 트럼본 팀파니 타악기 각 1명)는 극장과 잘 어울리는 규모였다. 16명의 합창과 4명의 무용도 적절하게 녹아들며 효과를 더했다. 

고태암의 음악은 공들여 작곡한 흔적이 역력했다. 오케스트라는 현대 어법을 구사했지만 현의 글리산도와 트레몰로로 옛스런 느낌을 잘 살렸다. 다양한 리듬 패턴을 구사하여 지루하지 않았고 악기의 다채로운 질감과 색채감이 만족스러웠다. 예술가곡의 감성을 버무린 노래들은 오페라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만했다. 1막 몽유병으로 방황하는 영래(소프라노 이효진, 성이현)의 아리아 ‘사랑을 말해’와 2막 죽음을 앞둔 영창(테너 석승권, 원유대)의 아리아 ‘내 사랑 홍매화’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무대 위의 성악과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가 다른 음악 어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앙상블이었을 텐데, 지휘자(정주현)과 음악코치(김정원, 윤빛나)를 중심으로 열심히 연습한 결과 편안한 앙상블을 이룰 수 있었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붉은자화상' 커튼콜 장면.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붉은자화상'의 한 장면.

굳이 욕심을 부리자면, 오케스트라가 성악의 반주나 앙상블에 머물지 않고 출연자의 심리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 주었다면 극적 효과를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가령, 2막 영래가 ‘역모’를 알게 되는 대목에서 그녀가 느꼈을 청천벽력같은 충격을 오케스트라가 묘사해 주면 청중들은 훨씬 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한 대목 더 있다. 영창이 심문받는 대목은 여러 사람의 격렬한 고뇌가 한꺼번에 펼쳐진다. 영창은 스승 윤두서와 사랑하는 영래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죄를 짊어진다(윤두서의 역모가 밝혀지면 삼족을 멸하기 때문에 영래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윤두서는 영창이 역모를 혼자 뒤집어 쓰는 걸 방치하면서 극심한 가책을 느낀다(윤두서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지만 자신의 역모를 인정하면 딸 영래까지 죽게 된다). 이 장면에서 윤두서와 영창의 처절한 갈등과 고뇌를 오케스트라가 표현해 주었다면 이 오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붉은자화상' 중의 한장면.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붉은자화상' 중의 한장면.

김민정의 대본은 훌륭했다. 윤두서의 걸작인 <자화상>을 중심에 두고 영창과 영래의 사랑 이야기를 펼친 상상력은 설득력이 있었다. 1막에서 <자화상>을 그리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2막에서 3년전 역모에 얽힌 이야기를 푼 뒤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 것은 역동적인 효과를 낳았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1인 2역을 보여주는 방법은 개선할 여지가 없지 않아 보인다. 영창과 ‘검은 남자’(죽은 영창의 혼)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관객들이 자연스레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모가 ‘흑야’(영창과 영래의 영원한 결합을 축원하는 영매)라는 사실이 잘 전달됐는지는 의문이다. 2막 피날레 직전 ‘흑야’의 아리아가 나오는데, 너무 늦게 나왔다는 느낌이다. 이 아리아는 2막 주모과 조선달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 이어서 나오도록 배치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드라마의 피날레가 아니라 ‘복선’으로 활용하는 게 적절했을 것이다. 

또 하나, 피날레 직전에 윤두서, 영창, 영래의 삼중창을 하나 넣어 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극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윤두서, 영창, 영래가 자기 심경을 동시에 노래하며 음악적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면 더 바랄 게 없었을 것이다. 한 장면에서 주요 출연자들이 자기 입장에 따라 다른 가사를 노래하며 앙상블을 이루는 것은 오페라만 보여줄 수 있는 묘미다. 빅토르 위고는 베르디 <리골레토> 사중창을 본 뒤, “소설로 할 수 없는 것을 오페라는 할 수 있다”며 경탄하지 않았는가. 옥에 갇힌 영창을 바라보며 다섯 명이 자기 입장을 노래하는 오중창이 있긴 하지만 다소 산만하다. 주인공 3명이 함께 부르는 삼중창이 훨씬 더 임팩트가 클 것이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붉은자화상' 커튼콜 장면.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붉은자화상' 커튼콜 장면.

브로셔에 대본이 없는 게 아쉬웠다. 대본을 다 넣는 게 어렵다면 주요 장면과 넘버 제목이라도 정리해서 넣어 주면 관객들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출연자들 커리어는 간략히 처리하고, ‘시놉시스’는 좀 더 구체적인 장면과 넘버 소개에 할애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울러, 대중에게 어필할 만한 주요 넘버를 전략적으로 홍보할 방법도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중적인 뮤지컬에서 흔히 구사하는 전략 아닌가. 뮤지컬보다 더 어렵게 여겨지는 오페라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 아닐까.

예술감독 장수동은 기획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공재 윤두서가 객석을 향해 묻는다. 그대에게 자화상이란 무엇이요? 자화상, 새로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네….”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현실의 이야기란 뜻으로 읽힌다. 창작 오페라 <붉은 자화상>은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는 빼어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