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미술로 세대를 잇다⋯아르코미술관 50주년 기념展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
[현장스케치] 미술로 세대를 잇다⋯아르코미술관 50주년 기념展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3.12.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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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세대 작가들이 팀 이뤄⋯9팀 교류 통한 결과물
작고 작가 3인 포함 작가 22인‧작품 200점 개괄
관동대학살 ,암태소작항쟁 등 중요한 사건 다뤄
아르코미술관 역사 살필 아카이브 공간도
8일부터 내년 3월 10일까지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아르코미술관(관장 임근혜)이 개관 50주년을 기념하며 작가 선정 권한을 내려 놨다. 이번 전시에서 아르코미술관은 인연을 맺었던 관계자들이 작가를 선정하도록 했다. 선정된 작가들은 교류하고 싶은 다른 세대의 작가와 자율적으로 팀을 이뤄, 총 9팀이 구성됐다. 신인 작가들과 작고 작가 3인 포함 국내작가 22인이 참여, 이들이 선보이는 작품 200점(아카이브 자료 포함)이 8일부터 전시된다.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 전시 입구 전경 ⓒ서울문화투데이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 전시 입구 전경 ⓒ서울문화투데이
 

전시는 오늘날 미술관의 기능 중 하나인 '네트워크 구축'을 본질적 요소로 채택했다. 선정 작가의 추천을 통해 초청된 작가의 80% 이상이 아르코미술관에서 처음 전시하는 작가다.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고루 참여해 미술관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교류를 통해 파생된 결과물을 선보인다. 작가 간 교류의 결과물을 통해 관계의 확장으로 형성되는 예술창작의 방법론을 고찰하는 시도다.

선정 작가와 추천 작가로 구성된 팀은 다음과 같다. ▲박기원×이진형 ▲서용선×김민우×여송주 ▲신학철×김기라 ▲이용백×진기종 ▲정정엽×장파 ▲조숙진×이희준 ▲채우승×최수련 ▲최진욱×박유미 ▲홍명섭×김희라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 전시 시작 전경 ⓒ서울문화투데이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 전시 시작 전경 ⓒ서울문화투데이

전시명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는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영감을 받았다. 들뢰즈에게 주름은 '안으로 말려들어간 밖'으로, 외부 조건에 응해 발현되는 내부의 잠재성이다. 외부에 규범을 두지 않고 내부에서 자유롭게 접기와 펼치기를 통해 모습을 가진다.

이번 전시는 사유체계로서 주름이 지닌 과거와 미래의 접점, 여러 흔적과 접촉의 계기로 생긴 다양체의 속성을 전시에 접목했다. 미술관의 현재가 접점의 궤적과 경로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살펴보고, 미술관의 미래가 어떤 접점들로 그려질 것인가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작품을 소개하는 김민우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품을 소개하는 김민우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김민우, 신학철, 김기라, 홍명섭, 김희라, 정정엽, 장파, 조숙진, 이희준, 김명희 총  10인의 작가가 참석해 작품을 소개했다. 

김민우 작가는 암태도에서 서용선 작가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암태 소작 항쟁을 다루는 작업을 하게 됐다. 작가는 텍스트들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모습을 연출한 비디오를 통해 역사적 사건들이 기억되고 잊혀지는 과정을 재현했다.  옆에 전시된 애니메이션 영상은 소농 서태석을 다뤘다. 소리에 반응하는 인터랙션 작품으로, '서태석이 고문을 당하던 상황에서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떠한 대답을 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작품을 소개하는 신학철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품을 소개하는 신학철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신학철x김기라, 관동대학살과 사회문제 다뤄

신학철 작가는 9m 길이의 대형 회화 작품을 소개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출품한 신작으로, 관동대학살 100주년을 추모하고자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담았다. 작품은 마치 사진과 같이 생생하다. 작가는 "일본 정부에서는 기록이 없다며 회피하는데, 사진이 기록이며 이것이 바로 실제 현장이다"라며, "이 작품을 그릴 때 유해를 발굴하는 것과 같았다. 땅 속의 죽음을 바깥에 모셔놓듯 정성을 들였다"고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김기라 작가는 "1995년 <민중미술 다시보기>展에서 신학철 작가의 작품을 접하고 영향을 받아, 예술가로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고민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업에서 그는 <장님과 벙어리>를 통해 볼 수 있지만 말하거나 듣지 않으려는 지식인의 모습과 말할 수 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오늘날의 대중을 재현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어떻게 뭉쳐 미래로 나아갈지 고민하는 동시대 한국 사회의 초상이 담겨있다.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인 크시스토프 펜데레츠키가 한국인을 묘사해서 작곡한 교향곡 '한국'이 함께 플레이 된다.

작품을 소개하는 홍명섭 작가와 김희라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품을 소개하는 홍명섭 작가와 김희라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홍명섭 작가와 김희라 작가의 협업은 '바느질'이라는 행위에서 수렴한다. 김희라 작가는 오래전부터 천이나 실을 활용한 작업을 통해 결과와 폐쇄성을 중시해온 한편, 홍명섭 작가는 과정 중심의 예술, 사물의 의미 구축과 해체에 관심을 두어 왔다. 둘은 대척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생성과 변주'에 주목했다. 이들의 작품은 마치 버섯이나 곰팡이가 기생하여 숙주를 변질시키듯, 미술관 곳곳에서 은밀하게 생성되어 서로의 작품과 장소에 개입하고 변주를 준다.

홍명섭 작가는 김희라 작가의 작업에 개입하고 변주하는 방식으로 '바느질'에 집중했다. 그는 "천을 찢고 들의붙이는 광경을 보며 바늘과 칼 가위 등 바느질에 쓰이는 도구들의 사용 기제를 고찰해보니, 오랜 역사 속에서 고문기구로 쓰이던 것들이었다"라며, "살육과 생존, 가학과 생산, 독과 약 따위의 접점과 양가성의 발현에 주목했다"라고 덧붙였다.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정정엽 작가와 장파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정정엽 작가와 장파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2층으로 올라가면 정정엽 작가와 장파 작가의 작품이 반겨 준다. 이 둘의 경우, 페미니즘 미술을 접점으로 협업하게 됐다. 정정엽 작가는 '사라지고 유약한 존재가 가진 저항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신체 언어를 희구하는 드로잉을 통해 이미지화해왔다. 장파 작가는 2011년부터 여성 혐오 이미지의 서사적 계보, 혹은 남성 젠더 중심의 거대 서사에서 귀 기울이지 못했던 '여자들의 세계'를 다루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그로테스크한 신체의 형상을 통해 대담하게 표현하며 상투화된 여성성을 비튼다.

이번 작품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에서 장파 작가는 제주의 '설문대 할망 설화'를 회화 작업으로 풀어내며 여성 신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정정엽 작가는 이러한 작업 계획을 듣고 진행하던 <나방> 시리즈 작업과 연결지었다. 나방의 군무가 여성 신의 다양한 이미지와 어울릴 것 같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정정엽x장파 작품 전경 (사진=아르코미술관)
정정엽x장파 작품 전경 (사진=아르코미술관)

정정엽 작가가 장파 작가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호기심'과 '도전'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 중 함께 작업하는 것이 도전이 되는 작가를 선택했다. 정정엽 작가는 "장파작가와 결합되는 순간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도전하는 마음으로 선택했다"라며 "많은 대화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 나에게는 아주 충만하게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두 작품은 '보이지 않는것'이라는 주제를 공유한다. 정정엽 작가에 따르면, 혐오는 고정관념과 '모르고자 하는 것'들 속에서 발생한다. 장파 작가가 생명이 탄생할 때 비가시화되곤 하는 피와 물질, 고통, 신체와 본능에 집중했다면, 정정엽 작가에게는 '나방'이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소재다. 우측에는 장파 작가의 작품이 웅장하게 펼쳐지고, 좌측에서는 정정엽 작가의 나방들이 공중에 설치돼 전시장을 떠도는 풍경을 연출한다.

이희준 작가와 함께 작품을 설명하는 조숙진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이희준 작가와 함께 작품을 설명하는 조숙진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뉴욕에서 활동중인 조숙진 작가는 이번 전시 제안을 받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약 50명 이상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했다. 기나긴 리서치를 거쳐 '추상'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이희준 작가를 선택했다. 그들은 둘 사이의 '시차'에 집중했다. 공간을 기준으로 하면 뉴욕과 서울이라는 지리적학적인 시차와, 과거 조숙진 작가가 서울에서 활동했던 1980년대와 이희준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 현재라는 40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이 시차를 극복하거나 연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추상을 택했다.

이희준 작가는 조숙진 작가의 조각 작품을 미리 사진으로 받아보고, 회화 작품과 이어나갈 방법을 고민했다. 작품 <암흑 물질>은 조숙진 작가가 쓰는 검정 잉크에서 받은 영향과, 당시 시공간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의 사유를 투영하고 있다. 조숙진 작가는 "대학원을 다닐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워 가구의 파편을 이용해 작업하게 됐는데, 나무나 합판들이 회화적이고 조각적인 실험을 가능케 했다"라며 "이희준 작가의 작품은 회화적, 건축적, 종합적 요소들이 눈에 띄어 같이 전시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차섭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김명희 작가와 차승주 큐레이터 ⓒ서울문화투데이
김차섭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김명희 작가와 차승주 큐레이터 ⓒ서울문화투데이

작고작가 3인 유작, 미전시작 선보여

이번 전시는 전시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던 작고 작가 3인(공성훈, 김차섭, 조성묵)의 유작과 미발표작을 함께 선보인다. 공성훈의 대표작인 <개> 시리즈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작을 포함하고 있다. 잘 알려진 후기작은 개의 형체가 화려하고 뚜렷하게 나타난 것에 비해, 초기작은 알 수 없는 형체처럼 흐릿하게 묘사돼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故김차섭 작가의 유족인 부인 김명희 작가는 김차섭 작가의 작품에서 삼각형이 갖는 의미를 설명했다. 김차섭 작가는 어렸을 적부터 기하학을 좋아했다. 기하학을 오랜 시간 연구한 결과, 삼각형이 원근법의 기초가 된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삼각형은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모서리가 태워진 삼각형이 있다. 김차섭 작가는 삼각형의 90도 각도를 태우며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시에는 작품을 구상하던 의도를 엿볼 수 있도록 김차섭 작가의 작업 노트가 함께 비치돼 있다. 

아르코미술관 별관, 아카이브 ⓒ서울문화투데이
아르코미술관 별관, 아카이브 ⓒ서울문화투데이

별관에서는 박기원×이진형 작가의 작품과 함께 아르코미술관의 아카이브 자료를 만나볼 수 있다.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 발굴 및 재조명, 실험적 작품의 창작산실로서의 미술관의 기능을 상기하고자 기획했다. 자료는 미술관의 역사를 일괄하는 도록, 출판물, 사진, 영상 등으로 구성했다. 

아르코미술관은 1974년 종로구 관훈동에서 '미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해 1979년 현 위치인 동숭동으로 이전했다. 초기에는 대관 중심으로 공간을 운영해 일주일에 전시가 세 개씩 열리기도 했다. 서울에 전시 공간이 많지 않던 시기인데다 대관료가 저렴했기 때문에 이 당시 '미술회관'은 작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990년대 이후 공사립 미술관과 상업화랑이 증가함에 따라 대관을 줄이고 점차 기획전 중심으로 전환했다. 2002년에는 '마로니에 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이끄는 공공미술관으로 성장했다. 200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면서 오늘날의 '아르코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이러한 아르코미술관의 역사를 연도별로 톺아볼 수 있다.

소감을 밝히는 임근혜 관장 ⓒ서울문화투데이
소감을 밝히는 임근혜 관장 ⓒ서울문화투데이

이날 간담회에서 임근혜 관장은 “다양한 예술 주체가 교류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는 장소로서 기능해 온 아르코미술관의 과거와 앞으로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전시는 무료로 진행되며 월요일은 휴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자세한 정보는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www.arko.or.kr/artcenter/)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