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21세기의 신동’ 킷 암스트롱 독주회, 큰 감동 선사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21세기의 신동’ 킷 암스트롱 독주회, 큰 감동 선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12.11 1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 브렌델과 다른 ‘낭만 스타일 모차르트’ 흥미로워
바흐에 대한 존경과 진지한 음악성, 청중 매료시켜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 '모차르트 평전'저자▲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모차르트 평전'저자.

킷 암스트롱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피아니스트였다. 7살 때 작곡을 한 ‘신동’으로, 피아노 독주곡은 물론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을 꾸준히 써 왔다. 그는 <바흐, 리게티, 킷 암스트롱>이란 앨범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음악 뿐 아니라 생물학, 물리학, 화학, 수학 등 자연과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그는 파리 6대학의 수학 석사 학위를 갖고 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앞에 한 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를 정도로 강한 집중력의 소유자…. 제자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알프레트 브렌델은 어린 그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결국 그를 생애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브렌델이 그를 얼마나 아꼈으면 은퇴 직전인 2008년~2009년 촬영한 다큐멘터리 <Set the Piano Stool on Fire>에 함께 출연하여 레슨 모습을 공개하고 상세한 인터뷰에 응했을까. 

12월 6일 저녁 8시, 마포문화재단이 ‘M클래식 축제’의 일환으로 마포아트센터에서 마련한 세 차례의 피아노 리사이틀 <3 Peace Concert>의 둘째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킷 암스트롱은 달콤한 미소를 띈 30대 초반의 훈남이었다. 

첫 레퍼토리는 J. S. 바흐의 ‘6개의 코럴 전주곡’. 원래 오르간곡을 피아노로 편곡한 작품이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 바흐에 대한 존경과 헌신이 담긴 그의 연주는 첫 음표부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밝은 분위기의 첫 곡으로 시작, 슬픔과 어둠의 굴곡을 거친 뒤 경건하고 차분하게 마무리하여 일종의 스토리 라인을 들려 주었다. 넷째 곡 <주 예수 크리스트여, 그대를 부릅니다> F단조는 가장 깊은 감정의 울림을 담고 있었다. 브렌델은 10대의 킷 암스트롱에 대해 “엄청난 테크닉, 건강하고 탄탄한 리듬 감각, 여러 성부를 잘 통제하며 연주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며 “타고난 바흐 연주자”라고 평한 바 있다. 이날 연주는 브렌델의 찬사가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지난 8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아노 신동 킷 암스트롱의 열정적인 연주 모습.(사진=마포문화재단)
▲지난 6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아노 신동 킷 암스트롱의 열정적인 연주 모습.(사진=마포문화재단)

이어진 곡은 카미유 생상스의 모음곡 <앨범> Op.72, 바흐의 ‘6개의 코럴 전주곡’과 대칭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프렐류드-카리용(편종)-토카타-왈츠–나폴리풍의 노래–피날레 등 6곡으로 구성돼 있었다. 낭만시대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천재였던 생상스가 50살을 바라볼 때 쓴 작품으로, 프랑스 음악 특유의 질감과 색채감이 돋보이고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흥미로운 모티브가 넘쳐난다. 킷 암스트롱은 장면마다 변화하는 다양한 정서를 역동적인 에너지로 표현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부가 바흐와 생상스의 대조를 들려주었다면 2부는 모차르트와 리스트가 대조를 이루는 구성이었다. 

‘21세기의 모차르트’란 별명을 갖고 있는 킷 암스트롱이 모차르트 소나타 D장조 K.284를 어떻게 연주할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모차르트 해석은 “젊고 싱싱했다.” 강약 다이내믹이 선명했고, 거의 ‘낭만적’이라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여 주었다. 이 소나타의 중심이 되는 3악장의 첫 주제에서 피아노(p)와 포르테(f)를 극명하게 대비시킨 것은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 보기 힘든 해석이었다. 특히 제4변주의 첫 음 – 낮은 A음 – 을 연주할 때 체중을 실어서 건반을 강타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모차르트가 보았다면 “Taste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모차르트 해석은 나름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극단적인 다이내믹을 구사했기 때문에 자칫 조악하게 들릴 위험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연주였다. 특히 아름다운 아다지오 칸타빌레의 제11변주에 청중들은 숨소리를 죽일 정도로 매혹되었다. 

▲지난 8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아노 신동 킷 암스트롱이 연주에 앞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 6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아노 신동 킷 암스트롱이 연주에 앞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브렌델은 제자 암스트롱에 대해 “나의 연주를 따라하며 복제하는 게 아니라 음악에 대한 나의 느낌과 이해를 파악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한 뒤 연주한다”고 설명했다. 스승과 제자의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스승은 K.284를 녹음하지 않았다. 브렌델이 남긴 다른 모차르트 녹음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암스트롱의 모차르트 해석은 브렌델의 그것과는 거리가 커 보였다. 스승의 길과 제자의 길이 다를 수 있으며, 꼭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 이어질 젊은 음악가 암스트롱의 행로에 계속 주목할 일이다.  

이어진 곡은 프란츠 리스트 <타소의 죽음의 승리> S.517이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연주해야 하는 난곡인데 모차르트에 비해 오히려 편안하게 들렸다. 어두운 화음, 당당한 행진, 사색과 명상의 시간이 자연스레 펼쳐졌고, 청중들은 커다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마지막 음표를 조금만 더 천천히 쳐서 여운을 길게 남기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전체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연주였다. 12곡으로 이뤄진 리스트의 <크리스마스 트리> 모음곡 중 5번 ‘나무에 촛불을 밝혀라’와 9번 ‘저녁종’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청중에게 바치는 작은 선물이었다. 부드럽고 사랑스런 화음은 청중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지난 8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아노 신동 킷 암스트롱과 김도현, 타케치와 유토, 세 연주자가 라흐마니노프의 "여섯 손을 위한 로망스'를 연주하는 건반 위 모습.(사진=마포아트센터)
▲지난 6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아노 신동 킷 암스트롱과 김도현, 타케치와 유토, 세 연주자가 라흐마니노프의 "여섯 손을 위한 로망스'를 연주하는 건반 위 모습.(사진=마포아트센터)

앵콜은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중 첫 곡, C장조의 프렐류드와 푸가였다. 킷 암스트롱은 이 곡을 놀랄만한 유연성과 섬세함으로 연주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 바흐로 시작한 리사이틀을 바흐로 마무리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킷 암스트롱 자신의 작품을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그는 바흐에서 멈췄다. 자기를 과시하기보다 바흐에 대한 존경을 앞세우는 진지한 음악가의 면모였다. 

리사이틀이 끝난 뒤 이 날의 주인공인 대만계 미국인 킷 암스트롱과 함께 한국의 김도현과 일본의 타케자와 유토가 무대에 올라 라흐마니노프의 <여섯 손을 위한 로망스> A장조를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가 17살 때 가깝게 지내던 세 자매 – 나탈리아, 류드밀라, 베라 스칼론 - 를 위해 쓴 아름다운 소품이다.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의 2악장 모티브가 펼쳐지는 흥미로운 곡으로, 화려한 쇼케이스가 아니라 정답고 따뜻한 앙상블이었다. 세 젊은 피아니스트가 나란히 앉아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흐뭇했다. 이들의 풋풋한 우정이 동아시아 평화의 거름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포문화재단이 지난 5일~7일  ‘M클래식 축제’의 일환으로 마포아트센터에서 마련한 세 차례의 피아노 리사이틀 '3 Peace Concert'의  김도현, 킷 암스트롱, 타케치와 유토.(사진=마포문화재단)
▲마포문화재단이 지난 5일~7일  ‘M클래식 축제’의 일환으로 마포아트센터에서 마련한 세 차례의 피아노 리사이틀 '3 Peace Concert'의 김도현, 킷 암스트롱, 타케치와 유토.(사진=마포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