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을 통한 사랑의 실천 I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을 통한 사랑의 실천 I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3.12.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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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조성모의 삶과 예술

 

▲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화가 조성모의 삶과 예술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독특한 삶의 이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느덧 30년이 돼가는 그의 미국 생활을 돌아볼 때, 대부분의 미국 이민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신산(辛酸)한 삶의 도정(道程)을 겪었다.

온 가족과 함께 뉴욕에 둥지를 튼 조성모는 대학원 학비와 생계를 위해 맨하튼(Manhatten)에서 리모 드라이버를 한다. 미국에 도착한 1992년부터 7년여간 계속한 리모 드라이버의 생활은 낮과 밤이 뒤바뀐 상태였다. 주로 어두운 밤에 세계무역센터(Manhattan World Trade Center)에서 승객을 태우고 장거리 운행을 하는 이 생활은 그러나 뜻밖에도 그에게 그림과 관련된 여러 소재와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흰색의 높은 담장이 인상적인 교도소 건물을 소재로 한 그림은 이 시기 대표작 중의 하나다. 그는 이 그림에 <벽(Wall)>(1995년 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화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높은 교도소의 흰 벽을 배경으로 가지가 무성하게 뻗은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서 있고, 벽의 너머로 둥두렷이 솟은 보름달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벽 위에 설치된 이중의 철조망은 이 건물이 교도소임을 알려준다.

나무들이 뿌리를 딛고 있는 땅은 어두운 색으로 칠해졌으며, 나무들 역시 어둡게 평면적인 실루엣으로 처리돼 있다. 나무와 숲을 소재로 한 조성모의 작품들이 심한 양식화적 경향을 보이는 특징의 초기 모습을 이 시기의 대표작인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부터 조성모는 도로 풍경을 즐겨 그렸다. 1991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에꼴 드 서울전]의 커미셔너 자격으로 내가 조성모를 전시에 초대했을 때에도 그의 그림은 도로 풍경이었다. 미술평론가이자 독립 큐레이터인 내가 조성모의 작품을 눈여겨보게 된 계기는 1991년에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거기에 예의 거리 풍경을 그린 [문명의 시그널(Signal of Civilization)] 연작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 작품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초현실주의풍의 기법과 도시 문명을 자연과 대비시킨 대담한 시각적 대위법에 주목했다. 이 무렵 서울은 인구 1천만 명을 넘긴 거대도시로 성장하여 각종 공해는 물론 인구 밀집에 따른 다양한 사회 내지는 환경 문제들을 낳고 있었다. 충남 부여 출신인 조성모는 그러한 서울 생활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을 한 1977년 무렵에 그는 주말이면 가족이 살고 있는 부여로 내려가기 위해 고속터미널이 있는 반포를 찾았다. 

허상. 도시 문명의 Signal. 161*130,3cm, 캔버스에 아크릴, 1991
허상. 도시 문명의 Signal. 161*130,3cm, 캔버스에 아크릴, 1991

Ⅱ.

조성모가 다닌 중앙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는 옛날부터 사실주의 전통이 강했다. 최영림을 비롯하여 장리석, 황유엽 등 구상계열의 교수들이 포진, 수많은 구상작가들을 화단에 배출했다. 교수들 중에서 추상작가는 오직 정영렬 뿐이었다. 그러한 중대의 극사실주의 전통은 기라성같은 작가들을 배출했다. 가령, 배동환과 변종곤은 민전을 통해 70년대의 화단에 부상했으며, 임흥순, 이명복, 이종구, 송창, 전준엽, 황재형, 천광호 등등이 모여 1982년에 <임술년>그룹을 창립했다. 이 무렵 조성모는 제11회 전국대학미전에 벽장에 쌓여있는 책들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책>을 그려 영예의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중대에는 반드시 극사실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의식을 지닌 작가들도 있었다. 예컨대 김정식, 홍선웅 등등 중앙대학교 회화과 출신이 모여 결성한 <다무> 그룹은 1981년에 [대성리 31인]전을 개최, 국내 야외미술제의 첫 출범을 알렸다. 이 무렵은 모더니즘 일색의 화단에 1979년 <현실과 발언> 그룹이 촉발한 민중미술로 인해 서서히 균열의 조짐이 보이던 시절이었다. 

조성모는 이 시기를 화단의 체험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임동식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는데, 훗날 이때의 인연으로 인해 임동식을 주축으로 1980년에 창립한 [금강현대미술제]에 초대를 받게 된다. 그는 지역감정으로 왜곡된 백제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약 4미터 높이의 의자를 공주 인근의 금강 백사장에 설치했다.

그는 또한 70-80년대에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이면 대부분 참가한 미협 주최의 [앙데팡당]전에 수차례에 걸쳐 참가하는 등 청년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창작에의 열정을 불태웠으며, [대성리]전에 참가(1985-6), 동료 작가들과 함께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1987년과 1991년에는 [제1, 2회 대전 트리엔날레]에 연거푸 초대를 받았으며, 1987년에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87청년작가전]의 초대작가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