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회화’를 통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신회화’를 통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3.12.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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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올해 마지막 전시, 내달 20일까지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김영헌은 우주와 근원에 대한 사유를 디지털리티의 새로운 감각으로 형상화해왔다. 디지털 시대의 '신회화'는 순수성에서 탈피해 무엇과 섞여도 좋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방향성이다. 학고재갤러리에서 지난 20일부터 내달 20일까지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이러한 사유를 담은 <일레트로닉 노스텔지어>연작 22점을 만나볼 수 있다. 

▲김영헌 작가 (사진=학고재갤러리)
▲김영헌 작가 (사진=학고재갤러리)

그린버그, 폴 들라로슈, 한스 벨퉁 등은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김영헌 작가는 20세기 회화와 21세기 회화의 차이에 대해 의문점을 던졌다. 오늘날 글로벌 미술계에서 통용되는 회화는 20세기 회화의 재구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영헌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영국 런던예술대학교 첼시 칼리지에서 석사학위 취득 후 혁신적인 설치미술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동물의 날고기로 만든 인체 형상이나 실험용 쥐를 사용한 설치 작품은 90년대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영국 유학 후 작가는 회화로 전향해 뉴욕, 프랑스, 홍콩을 오가며 '신회화(new painting)'라는 새로운 축을 따르고 있다. 그동안의 회화가들이 외부 세계의 재현, 심상의 표현, 형식미의 추구에 집중했다면, 김영헌은 우주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통해 얻은 결론을 회화로 구성한다. 

▲전시장 전경 (사진=학고재갤러리)
▲전시장 전경 (사진=학고재갤러리)

전시 제목인 ‘프리퀀시(frequency)’는 회화적 주파수를 의미한다. 작가에게 회화적 주파수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이 주파수가 우연히 맞아 화음을 이루는 것과 같다. 디지털 시대의 회화는 순수성을 추구하던 모더니티 회화에서 탈피해 그 무엇이 섞여도 좋다는 것이 작가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김영헌은 20세기 회화의 특징이 평면성을 본질로 보는 모더니티에서 출발한다고 진단했다. 반면 동시대의 회화의 특징은 새롭고 인공적인 감각이자, 노이즈와 왜곡으로 점철된 디지털리티에 있다고 본다. 

작가는 세계를 이루는 것은 물질인 동시에 파동이라 여기며, 이러한 물리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연작을 탄생시켰다. 작가는 디지털리티의 새로운 감각을 '일레트로닉 노스탤지어'로 명명했다. 디지털리티는 김영헌의 회화에서 새로이 재탄생한다.

김영헌,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00x80cm
▲김영헌,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00x80cm (사진=학고재갤러리)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작품인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는 동심원 형상을 통해 파동을 연상시킨다. 우주의 화이트홀과도 흡사한 형태로,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근원을 은유한다. 

작품의 중심부에서는 대비되는 색들이 충돌과 화합을 거듭하고 있다. 작가는 어릴 적 낚시를 하다가 물결의 움직임에 집중해 시공간을 왜곡하고 변화시키는 듯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 때의 경험을 반영해 작가의 작품 대부분은 충돌 속에서 조화를 찾는다.

김영현의 작업에는 디지털적 속성과 아날로그적인 속성이 공존한다. 작품 표면의 색 면, 형광색과 절단된 화면 구성 방법 등이 디지털적 속성이라면, 혁필 줄무늬와 뿌려진 물감 자국, 팔레트 나이프 자국, 기하학적 선과 스크래치 등은 아날로그적 속성이다. 아날로그의 연속성과 디지털의 비연속성, 기하학적 파형과 자유 파형, 이질적 회화 요소들이 공존하거나 대립하며 회화적 상상력을 생성한다.

레이어를 가진 색면 부분은 주로 팔레트 나이프로 구현하고, 줄무늬 부분은 유화 재료를 사용해 실험해 온 혁필기법을 사용한다. 혁필 느낌의 줄무늬들은 다듬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보통 한번의 붓질로 구축된다. 이렇게 혁필 줄무늬와 팔레트 나이프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색면을 대립항으로 배치하며 예측 불가한 요소들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아날로그 음악이나 왜곡된 TV 화면, 필름 영화에서 보이는 잡음, 스크래치 같은 요소처럼, 작업 중에 생긴 얼룩, 선, 점 등의 인간적 요소를 남기거나 더하면서 작품은 완성된다. 

▲전시장 전경 (사진=학고재갤러리)
▲김영헌, P22048-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2, 린넨에 유채, 97x130cm
(사진=학고재갤러리)

김영헌 작가는 “디지털 시스템이 아날로그적 속성을 동경하는 부분이 있다면, 인공지능 데이터가 소리나 감각을 통해 인간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지점일 것이다”라며 “바쁠 때라도 LP를 꺼내고 바늘을 올려서 듣는 잡음 섞인 음악이, 정든 고향집처럼 편안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듯하다”라고 이야기했다.

김영헌의 작품을 볼 때는 ’층위’에 집중해야 한다. 회화의 표면이 두터우면서 투명하기는 불가능한데, 김영헌의 작품은 그 불가능한 접점을 실현시킨다. 여러 층위를 구분해 색과 색을 충돌시키고 노이즈가 들끓듯이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정교한 터치와 대비되는 강렬한 운동감은 화면에 벡터를 구성한다. 그의 작품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교차점을 선명하게 가로지르며 어떠한 노스텔지어를 자아낸다. 관객들은 작가의 기민한 제스처를 눈으로 좇다 보면 어느새 그의 작품이 발산하는 끝없는 운동감과 리듬에 빠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