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을 통한 사랑의 실천 II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을 통한 사랑의 실천 II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4.01.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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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조성모가 가열차게 미술활동을 해나가던 80년대 중반의 양상은 젊은 작가들이 소그룹 운동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메타복스(Meta-Vox)>를 비롯하여 <난지도>, <TARA>, <로고스와 파토스>와 같은 그룹들이 서로 다른 입장과 이념을 표방하면서 화단에서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성모는 그룹 활동보다는 기획전에 초대를 받거나 형상성을 표방한 [동아미술제]를 비롯하여 [중앙미술대전], [한국미술대상전] 등 언론사가 주최한 각종 민전에서 입상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입지를 모색해 나갔다. 약간의 초현실주의적 표현술을 차용한 조성모의 <문명의 시그널> 연작이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80년대 후반이었다. 1980년부터 시작한 <도시 이미지> 연작에서 약 7년이 경과하자, 초기에 약간 추상적이며 기하학적 형태를 갖췄던 화면이 점차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로 바뀌면서 교통표지판과 쭉 뻗은 도로의 이미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본 1991년의 나우갤러리 개인전에는 거대한 도시의 빌딩 아래 아치형 터널이 보이고 그 아래로 삼각형의 교통표지판이 허공을 날아가는 장면의 그림들이 출품되었다. 

조성모의 [에꼴 드 서울]전에의 참가는 도시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세계가 인정을 받은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한국에서 계속 활동하면 작가로서의 입지가 탄탄해질 수 있는 청신호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가슴에 청운의 야심을 품은 조성모는 1990년에 하와이, L.A, 뉴욕을 답사한 후 이민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이민 길에 오른 것이다. 1992년에 이루어진 이 삶의 변화는 이국에서 맞이한 작가적 삶의 고난 속에서도 창작의 열정을 안고 가장으로 또한 작가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그래도 여유가 있는 액자가계와 화랑운영을 접게 만드는 최대의 위기를 몰고 왔지만, 그것은 반대급부로 전업작가로서의 기회를 만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러던 조성모가 큰 결심을 한 것은 2011년의 늦봄 어느 날이었다. 작품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가족과 잠시 결별, 뉴욕 시내의 한 건물에 스튜디오를 얻어 독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창작의 세계에 몰두했다. 조성모는 1985년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지금까지 약 37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고 150여 회에 달하는 단체전과 기획전에 초대된 중진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Ⅲ.

2012년, 사랑마운틴(Sarang Mountain)에의 입주는 조성모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전환점 내지는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 한 해 전에 조성모는 스튜디오에서 그동안 가슴 속에 일종의 한(恨)으로 자리잡은 창작에의 열정을 풀 기회가 있었다. 사랑 마운틴은 그가 ‘자연의 캔버스’로 간주, 그림을 그리듯 자연을 자신의 색깔로 그리는 필생의 작업이다. 그 자신의 인생에 정직한 조성모는 애초에 설정한 ‘문명, 도시, 인간’의 주제에 이제 ‘사랑(LOVE)’를 추가하여 사랑의 전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2009년, ‘사랑(LOVE)’이 작품의 주제로 등장한 이후 인간애, 인류애를 구현할 수 있는 센터로서 사랑마운틴은 이제 그 실천의 장소가 된 것이다. 

‘길’은 지난 40여 년에 걸친 조성모의 창작생활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테마이다. 아니, 조성모는 이제까지 오로지 ‘길’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입체, 설치 작업을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은 조성모 개인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길’인 동시에 실제로 작품 속에 표현된 구체적인 길이기도 하다. 유랑과도 같은 그의 인생의 길은 이제 사랑마운틴에 정착된 듯 보이지만 내면 속에서 그는 지금도 치열하게 길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하고 있다. 길은 조성모 작품의 대주제가 되는 ‘자연, 문명,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인류에게 미래의 비전을 비춰주는 통로 내지는 채널이기도 하다. 

Ⅳ.

한 인터뷰에서 조성모는 “인생의 여정에서 여러 경험을 하듯, 캔버스를 한 인생으로 간주, ‘길’로 분할하고 그 속에 여러 이미지를 넣는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대변한다. 그가 말하는 길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La Strada)>처럼 인생에 대한 은유로서의 길인 것이다. 사실, 조성모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이 말이 실감이 난다. 특히 그가 리모 드라이버로 무려 7년이란 세월을 바친 이력은 ‘길’의 상징성을 강도 높게 입증해 준다. 택시를 운전하며 관찰한 숲과 도시들의 풍경은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써 캔버스 표면에 육화(肉化)되었다. 경험하지 않은 생짜가 아니라 삶의 진한 담즙에 의해 녹아내린 강한 삶의 분비물로서의 이미지들이 캔버스에 각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심한 양식화적 경향을 보이는 술과 달, 나무, 도시 풍경 위에 부감법으로 써넣은 ‘LOVE’나 ‘사랑’과 같은 단어들에는 그가 바라보는 문명의 관점과 미래의 비전이 담겨 있다. 환경 오염에 의해 생태계가 나날이 파괴되는 이 총체적인 지구촌 위기의 시대에 ‘사랑 마운틴’에 기울이는 그의 열정과 관심은 단순한 노동의 의미를 넘어 지구촌 생태계 복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환경 문제에 기울이는 조성모의 관심과 끊임없는 육체노동을 통해 자연을 복원하려는 그의 의지는 요셉 보이스의 <7000 그루의 떡갈나무>(1982- 독일 카셀)로 대변되는 사회적 조각에 비견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인생 후반부의 시간을 투자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폐허를 아름다운 꽃들과 새, 나비들이 공존하는 옥토로 바꾼 이 역사(役事)는 크나큰 사회적 의미와 함께 인류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 마운틴으로 이주한 이후, 수년 전부터 조성모는 연필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수행(performance)에 가깝다. 집 주변에서 구한 나무를 깍아 크고 작은 연필을 조각하는 것이다. 조성모는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에 빗대 ‘굽은 연필(曲筆)’, 자본에 침식당한 언론을 썩은 연필(腐筆)로 묘사, 그 실상을 연필 조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풍자하고 있다.

작년에 조성모는 사랑 마운틴에 있는 약 40미터 높이의 나무에 올라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다듬어 연필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의 거대한 퍼포먼스이기도 한, 목숨을 담보한 이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조성모는 지금 높이 4미터의 육각형 연필을 만드는 중이다. 그는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무를 말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전기톱으로 잔가지들을 처내는 장면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열정에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모습은 젊은 시절에 용맹한 공수특전단의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조성모가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해 강인한 결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세인들의 뇌리에 기억될 것이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