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조선백자 붐은 온다” 조선백자가 낙찰가 1위를 차지하기까지
[기획] “조선백자 붐은 온다” 조선백자가 낙찰가 1위를 차지하기까지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1.10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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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려청자보다 조선백자의 시대
고 이건희 회장이 인정한 ‘명품’
BTS RM, 빌 게이츠도 달항아리 수집해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작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조선백자가 낙찰가 1위로 이름을 올렸다. 근 3년 간 낙찰 최고가를 꾸준히 차지하던 쿠사마 야요이를 누르고 <백자청화오조룡문호>가 70억원에 낙찰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백자대호가 39억원에 낙찰되며 낙찰가 3위를 기록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낙찰가격 상위 30순위에 조선백자가 무려 6점이나 포함됐다. 근 3년 간 조선백자가 낙찰가 30순위 내에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걸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결과다. 그동안 화려한 고려청자에 가려져 있던 “백자 붐”이 왔다. 이번 연말 결산을 통해 명명하게 수면 위로 드러난 백자 열풍은 어디서 왔을까? 그 근원을 추적해봤다.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년작, 캔버스에 유채, 55x35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년작, 캔버스에 유채, 55x35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백자

김환기 선생은 “내 예술의 모든 것은 달항아리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생전 달항아리에 큰 애착을 가졌다. 1950-60년대에는 달항아리를 집중적으로 그려, ‘항아리 귀신’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도상봉 역시 ‘도자기의 샘’을 뜻하는 ‘도천(陶泉)’을 호로 삼을 만큼 조선 백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백자에 담긴 화사한 꽃을 많이 그렸는데, 라일락, 개나리, 코스모스, 안개꽃 등이 견고한 조형미를 가진 백자와 만나 격조 있는 아름다움을 전한다. 이외에도 “우주를 담을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 달항아리(고영훈)”, “달항아리는 하늘의 이야기며 (...) 우리의 이야기다(강익중)”라는 등, 많은 예술가들이 조선 백자와 달항아리를 찬미해왔다.

프랑스 유명작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영혼의 미술관』에서 달 항아리를 소개하면서 표면에 작은 흠도 많고 부분적으로 변색되고 윤곽선도 완벽하지 않은 그 달 항아리가 “겸손(modesty)의 이상”을 보여 준다고 했다. 백자는 실용성을 가짐과 동시에 절제와 지조를 추구했던 유교적 미의식의 정수로 여겨져 왔다. 완전히 대칭을 이루지 않아 은근하고도 수더분한 멋을 지니고 있으며, 비교적 단순한 형태에서 오는 조형미는 화려한 청자와는 다르게 예술에 깊은 조예가 있는 이들만 진가를 알아볼 정도로 섬세하다. 백자는 고아하고 이지적인 순백의 백색에서 오는 전통미의 대표적 표상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미술가들의 뮤즈 역할을 해왔다. 

▲버나드 리치가 1935년 서울 방문 시 구입한 달항아리. 현재 영국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버나드 리치가 1935년 서울 방문 시 구입한 달항아리. 현재 영국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해외에서 일찍이 알아본 백자의 미

그동안 백자가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왔음에도 국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건 한국의 대표 도자기로 여겨져 온 고려 청자였으며 백자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미미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백자의 섬세한 미감에 오래 전부터 주목해왔다. 

‘민예’(민중적 공예)라는 단어의 창시자이자 일본의 역사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인과 영국인들이 대부분 고려청자에 관심을 가지던 시기 청자가 아닌 백자에 주목했다. 1916년 관광차 조선을 방문했다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그는 백자가 지닌 처연한 비애미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감을 강조했다. 그에 따라 컬렉터들도 조선 백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35년 영국인 버나드 리치 역시 야나기 무네요시와 동행하여 한국을 방문, 달항아리를 사서 가져가면서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당시 그가 주도하던 스튜디오 포트리 활동-공장화도니 공예품이 아닌 예술로서의 공예를 추구한 활동-과 맞물리며 조선 백자는 영국에서 재평가 받게 됐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달항아리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의 전 관장 베스 맥킬롭은 달항아리를 "한국 정체성의 아이콘"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17세기 백자철화 운룡문호. 96년 850만달러에 낙찰된 뒤 크리스티 도자 경매 최고가 자리를 10여 년 간 지켰다. (사진=리움미술관)
▲17세기 백자철화 운룡문호. 96년 850만달러에 낙찰된 뒤 크리스티 도자 경매 최고가 자리를 10여 년 간 지켰다. (사진=리움미술관)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철화백자운룡문호>는 무려 841만 7,500달러 (당시 환율로 한화 약 64억 원)에 거래됐다. 소더비 관계자인 안젤라 맥아티어는 "달항아리의 가격과 가치가 크게 이처럼 상승한 것은 달항아리의 매력이 이제 전 세계적으로 퍼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최고가로 거래된 백자는 <백자청화운룡문호>로, 2011년 18억 원에 낙찰된 걸 고려해보면, 해외에서는 국내 백자 열풍이 일기 오래 전부터 백자의 가치에 주목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조선의 막사발을 국보로 지정할 만큼 일찍이 조선 백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열광해왔다. 임진왜란 당시 ‘도자기의 신’으로 일컬어지던 이삼평을 비롯해 조선도공 수만 명을 납치해갔던 사건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본 도공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킨 조선 도공들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도자기 왕국’이라 불릴 만큼 괄목상대하게 된 일본의 백자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11월에는 삼청동 엘렌앤제이 갤러리에서 '백년만의 귀환, 조선도공 이삼평의 전승'이 열렸다. 일본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는 이삼평의 후예들이 빚은 도자기들이 백 년만에 한국을 찾았다. 2019년에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조선도자, 히젠의 색을 입다’를 주제로 한·일 문화교류 특별전이 열린 바 있다. 

▲구본창, 문 라이징 III, 2004~200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x80㎝(x12)
▲구본창, 문 라이징 III, 2004~200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x80㎝(x12)

국내외에 열리기 시작한 백자 전시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는 대중들에게 백자의 미를 각인시키는 촉매가 됐다. 그가 2006년 발표한 <백자> 시리즈는 해외 박물관에 조선 백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구본창은 “흩어진 백자를 모으는게 작가로서 숙명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이 아시안아트뮤지엄이나 필라델피아박물관에 백자와 함께 전시되기 시작하면서, 다른 해외 박물관들도 점차 소장하고 있던 조선 백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백자를 향한 관심은 2007년 규수국립박물관의 ‘조선 백자전’, 대영박물관의 ‘달항아리전’, 2010년 필라델피아박물관 ‘조선백자 사진전’까지 이어졌다. 대영박물관에서는 2013년에 ‘달항아리전’이 한번 더 열려, 달항아리와 이를 재해석하는 각국 도예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201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구본창의 백자 사진 작품과 백자 영상 작품이 전시됐다. 같은 해 국내에서도 백자에 주목한 전시가 열렸다. 서울미술관에서 6월 개막한《백자예찬 : 미술, 백자를 품다》전시를 통해 백자와 백자를 다룬 근현대 미술 작품들을 다루며 백자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10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당시 국내 최대 규모로 청화백자를 주제로 하는 특별전을 열어 14개 기관이 소장 중인 청화백자를 한 자리에 모았다. 

작년에는 리움미술관에서 국내외 명품 백자 185점을 한자리에 모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전이 열렸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조선백자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던 ‘백자철화 운룡문 호(壺)’가 전시됐다. 1세대 컬렉터인 삼성 창립자 고 이병철 회장부터 도자기 사랑이 이어졌는데, 고 이건희 회장은 가야 금관과 청자를 지극히 아꼈던 부친과는 다르게 백자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30대부터 백자를 수집하며 감정할 수준까지 올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자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그가 작고한 후 <이건희 컬렉션>을 통해 고미술품들이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면서, 생전에 애정을 가지고 수집해온 백자 역시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내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목록집 ‘백자편’ 2권이 발간될 예정이다.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를 안고 찍은 BTS RM의 사진. (사진=RM SNS)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를 안고 찍은 BTS RM의 사진. (사진=RM SNS)

‘명품’을 향한 동시대 유명인들의 관심

조선백자 중에서도 특히나 달항아리의 가치가 계속 상승하고 있는 이유로는 ‘희소성’이 제기된다. 18세기에 제작된 달항아리 중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 것은 12개에서 30개로 추정된다. 해외 전시를 통해 달항아리 고유의 미와 희소성이 알려지면서 유명인들은 국내 백자 명인들의 달항아리를 수집하고, 달항아리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는 최영욱 작가의 작품을 포함 3점의 달항아리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세계적인 K-POP 그룹 방탄소년단의 RM은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화제가 됐다. 대영박물관을 방문한 영국의 여배우 쥬디 덴치는 박물관에서 가장 맘에 드는 한 점을 꼽으라면 달항아리를 고르겠다고 했다. 명품 컬렉터로 잘 알려진 이부옥 회장은 오래전 집 한 채 가격에 버금가는 달항아리를 구입해 자다가도 일어나 달항아리를 향해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유명인들의 찬사에 힘입어 희소성을 필두로 조선 백자는 ‘명품’ 이미지를 제대로 알렸다. 김재열 전 리움미술관장의 증언에 따르면, 고 이건희 회장은 리움미술관을 방문해 전시된 도자기들을 보고 “왜 명품을 명품답게 전시하지 않나”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런던대학교 동양 아프리카학부의 한국미술사 강사 샬롯 호릭은 달항아리에 대해 "한국 미술사와 국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식민지 이후 초기 세대의 한국 예술가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분석했다. 미술품 시장 역시 ‘우리 것’에 주목하는 요즘, 조선 백자는 진가가 드러나지 않던 시기와 해외에서 열풍이 일던 시기 등 오랜 역사를 걸쳐 어느덧 대중들에게도 ‘가장 한국다운 명품’이라는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올 거라 믿었던 ‘조선 백자 붐’은 결국 오래 전부터 예정돼 있던 것일지 모른다. 이제 세상은 조선 백자의 수더분하면서도 우아한 곡선, 일그러진 모양새에서 오는 여유로움, 그 안의 진가를 알아볼 준비가 됐다. ‘백자 붐’은 이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