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30년 우정의 결실, 브람스 이중협주곡 A단조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30년 우정의 결실, 브람스 이중협주곡 A단조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1.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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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내 계획에 대해 말해 보겠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이네. 요아힘과 멀어졌기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네. 다행히 우리는 예술적인 면에 관한 한 변함없이 친구로 남아 있으니까…. 그와 다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를 기대해도 좋을까?” 

1887년 8월, 브람스는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이렇게 썼다. 브람스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와 요젭 요아힘(1831~1907)의 30년 우정이 낳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했을 뿐 아니라, 브람스가 피아노 협주곡 D단조를 초연할 때 지휘를 맡기도 했다. 1853년 브람스가 슈만을 만나도록 등을 떠민 사람도 요아힘이었다. 요아힘은 작곡가로도 활약했는데, 1857년 리스트, 바그너가 이끄는 새로운 음악 운동과 결별하고 슈만, 브람스와 가까워졌다. 1860년, 브람스와 요아힘은 ‘신독일악파’에 대항하는 음악 선언문을 함께 쓰기도 했다.

그런데 1880년, 요아힘이 이혼 수속을 밟고 있을 때 브람스는 부인 아말리에를 편들었고 그 일로 두 사람의 우정은 금이 가고 말았다. 요아힘은 브람스의 음악을 계속 연주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게 됐다. 브람스는 소중한 우정에 금이 간 데 마음이 쓰였고, 이 곡을 통해 우정을 회복하고자 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쓰겠다는 구상을 요아힘에게 1887년 7월 19일 편지로 전했다. “당신께 음악 뉴스 하나를 전하고 싶습니다. 흥미를 가져 주시면 좋겠지만….” 두 사람이 서먹해지고 7년이 흐른 뒤였다. 

요아힘은 오랜 친구이자 존경하는 음악 동료인 브람스의 제안에 따뜻한 마음과 기대가 담긴 편지로 답했다. 7월 24일, 브람스는 요아힘에게 이 곡의 구상을 정식으로 밝혔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작품을 쓰겠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군요. 여기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요아힘은 바이올린 파트에 대해 기꺼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심한 산고를 겪었다.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답답한 마음을 피력했다. “이 작품은 저보다 바이올린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써야 합니다. 피아노처럼 제가 확실히 아는 악기를 위해 쓰는 것과 조금밖에 모르는 바이올린을 위해 쓰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요.” 클라라 슈만은 격려의 글로 답했다. “그렇게 훌륭한 교향곡,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를 쓰신 분이니까 당연히 바이올린과 첼로라는 악기의 비밀을 잘 아시잖아요.” 

우여곡절 끝에 1887년 8월에 완성된 이 곡은 10월 18일 쾰른에서 초연됐다. 요아힘에게 바친 헌정의 말은 브람스의 소심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 곡이 그를 위해 쓰여 진 바로 그 사람에게” 

브람스가 지휘했고 바이올린은 요아힘, 첼로는 하우스만이 맡았다. 요아힘 4중주단의 첼로 주자였던 하우스만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Op.99을 초연한 사람이다. 브람스는 하우스만에게 첼로협주곡 써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이 협주곡으로 약속을 반쯤 지킨 셈이 됐다. 

클라라 슈만은 이 곡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초연 후 클라라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함께 놓는 게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연주자가 동시에 충분히 제 기량을 선보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미래에는 별로 연주되지 않을 거에요. 이 작품은 매우 재미있고 독창적이긴 하지만 브람스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신선하고 따뜻한 느낌이 없어요.” 

클라라 슈만의 평가가 틀렸음을 오늘 우리는 알고 있다. 브람스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54살 때의 작품으로, 매혹적인 선율과 화음, 풍부하고 유려한 음색으로 가득찬 곡이다. 고전주의자 브람스의 원숙한 내면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1악장 알레그로. 관현악의 투티(모든 악기가 함께 연주)에 이어 첼로와 바이올린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 존재를 알린다. 두 솔로 악기의 대화, 갈등, 조화의 과정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관현악의 불협화음이 해소되어 조화를 이루는 멋진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멀티 스토핑(한 번에 여러 현을 연주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풍부한 음색을 들려준다. 

2악장 안단테 (16:10부터), 호른과 목관이 네 개의 기본음(A-D-E-A)을 연주하며 시작한다. 두 악기가 유니슨으로 연주하는 부드럽고 근사한 멜로디는 초로에 접어든 두 예술가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는 듯하다. 삶의 무게와 우정의 깊이가 느껴진다. 

3악장 비바체 논 트로포 (생기있게, 너무 지나치지 않게. 24:25부터). 스케르초 풍의 주제는 가곡집 ‘치고이너리더’ Op.103에 나오는 집시 멜로디와 비슷하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서로 쫓고 쫓기며 어우러지다가 찬란한 대단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