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안녕, 백남준 선생님!"
[특별기고] "안녕, 백남준 선생님!"
  • 이동식 저술가
  • 승인 2024.01.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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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저술가
▲이동식저술가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rge Orwell, 1903~1950)은 1949년 6월에 <1984>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개개인의 모든 생활이 감시되고 오로지 텔레비전으로 정부의 일방적인 메시지만 주입되는 암울한 정보통제사회를 묘사한 것이고, 그것은 당시 스탈린 체제의 소련을 고발한 것이었는데 정작 이 소설이 우리 국민들에게 본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 소설의 싯점(時點)인 1984년 1월1일이아니었던가 싶다.

1984년 새해가 밝은 후 1월1일 자정을 넘은 시각(정확히는 1월2일 새벽 2시)에 우리나라는 KBS1텔레비전이 중계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텔레비전 종합예술축제를 보느라 눈을 비빈 분들이 많았고 1월2일 날이 밝으면서 도하 언론들은 이 프로그램의 시청 소감 등을 대서특필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전자문명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말살되는 암울한 사회를 그렸음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고, 한국인 예술가 백남준 씨가 해외에서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여러 나라를 위성으로 연결하며 펼친 첨단의 새로운 예술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람들은 백남준 씨의 비디오 예술을 본격 논의하면서 예술의 개념과 역할, 현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백남준의 프로그램이 가져다 준 영상과 메시지, 거기에 등장한 수많은 세계적인 일류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의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비디오 예술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요한 성찰과 전환의 화두가 되었다.

그로부터 만 40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의 예술관은 과거의 평면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시간적인, 미럐지향적인 4차원의 공간예술로 선회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우리들의 생활 전반에도 영향을 주어, 미술과 음악, 무용 등이 결합하는 총체적 예술의 씨앗이 되어 세계무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그것이 우리가 키워 온 전자산업을 바탕에 깔고 음악과 음식, 복식, 관광 등으로 세계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 선한 촉매제에 백남준씨가 기획하고 연출한 위성예술축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40년 전 이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을 받고 백남준 씨를 알게 된 사람들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도 이제 장년층에서 노년층으로 접어들었다. 2006년 백남준 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 나라와 세상이 너무 많이 발전하고 변해 백남준이 열어준 예술세계는 이미 상식으로 저장되었기에 굳이 그를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사회의 주류가 된 40대, 50대만 해도 백남준이란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프로그램을 직접 본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오마주
'굿모닝 미스터 오웰' 오마주

백남준이라고 하면 행사장에 나와 남의 옷을 자르거나 악기를 부수고, 텔레비전 수상기에 이상한 화면이 나오게 하거나 그 자체를 눕히고 쌓고 해서 입체물을 만드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아란 프로그램은 현대사회의 소통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예술적으로 다룬, 그 자체로서 살아있는 예술이었고 그 의미는 21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부각되었다. 백남준은 지구 상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탤레비전을 통해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예술을 함께 즐기는 작품을 만들었다. 거대한 구조물에 그의 꿈과 희망을 담았다. 그것은 기존의 예술방식에 대한 도전이자 혁명이었고 그것으로 해서 지구인들은 텔레비전을 서로 연결해서 대규모 행사들을 기획하고 열었으며, 현대 기술문명 속에서 메말라가는 인간들의 정서를 회복하려는 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의미를 미국인들이 먼저 파악하고 그를 미국의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해 워싱턴의 스미소니언에서 그의 아카이브를 사들이고 그를 위한 전시회를 제일 먼저 열어주었다. 그 뒤 그에 대한 대규모 회고전이 미국 영국 등에서 잇달아 열리고 있고,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그를 기억하는 활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대중들의 예술혼을 일깨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40년이란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백남준은 단순한 천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에 대한 외국의 평가에는 '그가 비디오예술이란 장르의 창시자'였다는 점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예술 장르라는 것은 어느 때 누군가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면 것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창의력과 담방울에 의해 이뤄지는 예술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은 '비디오 예술'이란 장르를 자기 손으로, 자기 아이디어에 의해, 당대에 만들었기에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천재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시대를 내다 보는 창의력과 창조력이 있었기때문에 가능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백남준은 현대 세계의 창의력과 창조력의 횃불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백남준이 일본인이나 독일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자랑이고, 미국인들이 뽑는 100대 예술인의 앞 머리에 백남준이 거명될 정도이기에 우리로서는 자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백남준을 우리에게서 멀리 외국으로 보내고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며 그의 사상의 기초를 닦은 곳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서울 어디를 가나 그를 알려주는 아무 표지도 시설도 없다. 유일하게 그의 생가 터에 있던 작은 미술관도 예산을 아끼려는 서울시에 의해 문을 닫을 뻔 하다가 여론의 반발로 겨우 남겨놓았다.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기 위한 백남준 아트센터가 있지만 서울에서 먼 용인에 있어서 그를 기억하는 외국인들이나 우리 일반시민들이 가보기가 쉽지 않다. 백남준이 만든 최대의 조각이라고 하는 <다다익선>도 다시 붉을 밝히긴 했지만 늘 켜져 있지는 않아 이 겨울엔 을씨년스럽다. 꼭 동상을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가 자란 서울 시내 중심가는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어서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그를 기억하고 내세울 시설이나 기념물을 세울 법도 하건만 그런 것은 없다. 다른 곳에도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나 예술가들들의 작품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있으나, 한국인으로서 세계에 한국의 존재를 알린 최고의 미술가인 이 백남준을 기억하려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1932년 생이어서 곧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다른 나라라면 자국 출신의 예술가를 기리기 위해 정부나 민간에서 큰 마음을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느 새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송 40년을 보낸다. 이제 서울 시내 어디를 가도 그를 기억할 아무런 기념물도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 그는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말하자면 굿모닝 미스터 백남준이 아니라 "안녕, 백남준 선생님!"이다. 백남준은 본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본인 음악가였고 거기에다 기술을 결합하고 매체를 합성하는 종합예술가가 되었는데, 지금 그에 대해서는 미술 쪽에서 작품 가격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걱정을 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를 밀봉해버렸다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음악 미술을 넘어 매체와 소통, 전자문명의 미래를 함께 열어간 그의 창의성, 그의 창조력을 자라나는 후대들에 알게 해주고, 일깨워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40년 전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송으로 날밤을 샌 전직 방송인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