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신진작가 5인이 보여주는 포스트 모더니즘, 《두산아트랩 전시 2024》
[현장스케치] 신진작가 5인이 보여주는 포스트 모더니즘, 《두산아트랩 전시 2024》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1.18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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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갤러리, 1.17-2.24
김영미, 박지은, 송예환, 임정수, 정여름 참여
회화, 조각, 영상, 설치, 인터렉티브 작품 9점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신진 여성 작가 5인의 개성을 담은 작품이 회화, 조각, 영상, 설치, 인터렉티브 등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 미술의 현위치를 시사한다.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에서 2024년 첫 번째 전시로 《두산아트랩 전시 2024》를 내달 24일까지 운영한다. 개관 전날에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젊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두산아트랩 전시 2024 전시전경 (사진=두산갤러리)
▲두산아트랩 전시 2024 전시전경 (사진=두산갤러리)

두산아트랩’은 두산아트센터가 시각예술과 공연 분야의 신진 작가 발굴과 지원을 위해 2010년부터 진행해 온 프로그램이다. ‘두산아트랩 전시’는 공모를 통해 35세 이하의 작가 다섯 명을 선정하고 단체전 형태로 소개한다. 이번 《두산아트랩 전시 2024》에 선정된 5인의 작가 김영미, 박지은, 송예환, 임정수, 정여름은 각자 다른 매체를 통해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기존의 체계에서 대상을 추출하고, 가공하여 다시 볼 것을 제안한다.

하나의 공통된 주제 아래 모인 것이 아닌, 주목할 만한 작업 세계를 지속적으로 지켜보고자 이 자리에 불러들인 만큼 다섯 명의 작가는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익숙한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존의 자리에서 떼어내 가져와 다시 보고, 비틀고, 시간을 지연시켜 재창안하는 이들의 작업은 현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이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의문을 바탕으로 한다.

▲작품 '아수라'에 대해 설명하는 박지은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품 <의자 위의 아수라왕>에 대해 설명하는 박지은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박지은(b. 1990)은 전통적인 동양 회화의 요소들을 동시대적으로 해석하고, 다른 매체의 특성을 끌어들여 동양 회화가 품고 있는 변주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소녀사천왕 시리즈’는 불교 회화에서 남성형으로 묘사되는 사천왕을 현대를 살아가는 소녀들로 치환한 작업으로, 동양화—수묵화와 채색화의 문법에 만화적 표현을 혼합한다. 작품 속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이야기와 개성을 품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요즘 젊은 층의 인기를 끌고 있는 길거리 간식인 ‘탕후루’를 들고 있는 캐릭터가 눈에 띈다. ‘길거리 음식 매니아’가 컨셉으로, 다른 작품에서도 ‘소떡 소떡’이나 떡복이 등 무언가를 항상 먹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된다. 작품이 허구 세계의 이야기와 현실 세계의 동시대 시간성을 동시에 투영하는 부분이다.

<의자 위의 아수라왕>(2021)과 <아수라 마왕 백화>(2021)에 묘사되는 아수라는 남, 여를 오가며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인물로,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키부츠지 무잔’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무잔 캐릭터 역시 현대적인 남성형의 모습 뿐만 아니라 전통 의상 기모노를 입은 여성형 모습으로 자유로이 변신하곤 한다. 악역임에도 ‘옴므파탈’스러운 매력적인 외형으로 인기를 끄는 캐릭터다. 작가의 ‘아수라’ 캐릭터는 아예 인기를 노리고 ‘인플루언서’로서 활동하는 SNS계정(@ssu.raa)까지 보유하고 있다. 전통적 상징과 의미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캐릭터성과 현실적 요소들을 부여해, 핍진성과 리얼리티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흥미를 유발하는 지점이다.

프레임 너머의 비단 표구가 단순히 원화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갇히지 않고 작품의 연장으로 기능하듯, 작가가 창안한 작품세계는 연속성을 가지고 작품 외부나 다른 작품을 통해 이어진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통해 견고한 세계관을 쌓는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와의 접점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앞서 작가는 평소 애니메이션이나 <나의 지구를 지켜줘>, <유리 가면>과 같은 옛날 일본 만화들을 즐겨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작품 ‘욕망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에 대해 설명하는 임정수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품 <욕망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에 대해 설명하는 임정수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임정수(b. 1988)는 조각과 이와 연계된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작업해 왔다. 우리의 인식의 범위 안에 있는 존재의 형식을 빌려와 제3의 조각으로 구현하고, 사람들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시험한다. 그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생성되는 부산물들에 관심을 가져 왔다.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물, 식물의 외형을 따라한 장식적 패브릭,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를 작품에 주로 사용한다.

이번 전시 작품 <욕망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2024) 역시 동물, 식물, 사물의 물성이 동일 선상에 놓이며, 재구성된 제3의 존재로서 고정된 주체와 시각을 벗어나게 한다. 작품은 ‘욕망을 타자로 정의하고 형상화할 수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해, 동물의 척추나 뼈의 연결고리 등 사람과 동물, 식물에게서 볼 수 있는 형태를 결합했다. 작가는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의 형체를 띠는 동시에 동·식물의 복합적인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에 서사가 부여된 것을 사실이라고 믿으며, 욕망을 이야기하고 욕망이 서로 얽히는 소통 과정에서 모든 타자들의 관계는 왜곡을 수반한다. 작가는 그러한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의 욕망을 이질적인 재료를 통해 형상화하고, 마치 그것이 여기에 도착한 것처럼 표현했다. 작가는 전통적이지 않은 재료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사실이나 정답처럼 여겨지곤 하는 전통이나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 태도를 반영한다.

▲떨리는 돌을 설명하는 김영미 작가의 모습 ⓒ서울문화투데이
▲<떨리는 돌>을 설명하는 김영미 작가의 모습 ⓒ서울문화투데이

김영미(b. 1990)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연속되는 행위와 그것이 만드는 변화에 주목한다. 그는 주로 영상 매체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긴장과 기대의 시각을 담아낸다. ‘움직임 시리즈’로 대표되는 전작들에서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몰두해 행하는 움직임을 담았다. 일견 무용해 보이는 이러한 움직임들은 결코 극적인 결과를 쉽게 얻어내지 못하지만 느리게 쌓아나간 작은 움직임들은 마침내 방향을 바꾸고, 변화를 일으킨다.

<떨리는 돌>(2022)은 영상을 기반으로 한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뒤편의 스크린에서는 흔들리는 악기가 클로즈업 된 상태에서 슬로우모션으로 재생되고, 앞쪽의 모니터 안에서는 돌탑을 마주할 수 있다. 관객이 돌탑 앞에 다가서면 센서가 이를 감지해 경비원들의 발걸음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재생되고, 그렇게 1분이 경과하면 돌이 떨어져 쌓인다. 1분간의 불편한 시간을 마주하고 인내하면 변화가 생기는 것이 작동 원리다.

떨어지는 돌은 쌓이지 않고 돌탑은 미완성의 상태에 머무른다. 작가는 구동 원리를 통해 돌탑을 완공하는 것이 작품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불편한 환경 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싸우고 버티려는 마음가짐이나 기대감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돌탑을 쌓았던 경험, 그 반복의 행위에 집중한다. 기획 당시 사회는 코로나19로 인한 암울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그러나 미래가 폐허가 될 수 있다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돌을 하나 던지고 기원하는 행위는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작업을 하게 됐다.

미완성의 상태인 돌탑에 다가오는 사람은 돌을 쌓음과 동시에 무너뜨릴 양가적 존재로서, 돌은 경고의 소리로 불안함을 드러낸다. 뒤편의 영상은 고요하고 느린 호흡으로 흔들림의 순간들을 포착하며 일렁인다. 작가는 결과를 알 수 없음에도 더 나은 삶을 바라며 기원하는 마음과 행위를 데우고 보관하고자 했다.

(누구의) World (얼마나) Wide Web에 대해 설명하는 송예환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누구의) World (얼마나) Wide Web>에 대해 설명하는 송예환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송예환(b. 1995)은 웹(web)을 기반으로 디자이너이자 작가로서 활동하면서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웹 환경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그에 대항하는 작업들을 선보여왔다. 그의 작업은 웹 환경이 야기하는 불편함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디지털 매체에서 기술에 기댄 편리함 아래 가려진 허점을 들춰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온라인에서는 대안적인 웹사이트를 제작해 낯선 경험을 불러일으키고, 오프라인에서는 웹에 대한 문제의식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친숙한 웹의 메커니즘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이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

<(누구의) World (얼마나) Wide Web>(2024)은 웹을 통한 네트워크와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제한된 언어와 문자, 그리고 장치적 한계를 은유한다. ‘WWW’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전 세계를 연결한다는 이상주의와 확장주의의 폭력성에 의문을 품는 데서 출발했다. 아래측 분절된 화면에서 돌아다니는 단어들은 기술중심사회를 미화하는 확장주의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표시한다. 정면에 보이는 무대 형태로 연출된 한글 자판은 온라인 공간이 얼마나 영어 중심이었는지 인식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면은 계속 재생되는게 아니라 암전된 상태에서 숫자가 카운트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거친다. 이는 브레인 포그 현상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온라인 공간에서 알고리즘이 찾아준 영상을 자동으로 재생시켜 능동성을 파괴하고 선택이나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화면을 차단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요즘 선호되는 ‘몰입형 공간’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다. 송예환은 디지털 매체의 속성과 구조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웹사이트와 장치는 사용자에게 낯선 행위와 경험을 이끌어낸다. 

▲긴 복도작품 설명을 듣고 있는 관객들 ⓒ서울문화투데이
▲긴 복도작품 설명을 듣고 있는 관객들 ⓒ서울문화투데이

정여름(b. 1994)은 한 장소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영상으로 재구성해 장소와 기억의 연관 관계를 추적한다. 그의 작업에서 GPS, CCTV, 위성사진 등의 기술 매체는 한 장소의 동시대와 과거를 간직하고 드러내는 매개체로서, 하나의 방법론으로 사용된다. 그는 인간의 이동성에 관심을 가지고 난민 문제, 이주 배경, 사라진 공간에 대해 추적해왔다.

<긴 복도>(2021)에서 탐정은 우연히 받은 엽서가 가리키는 장소인 미군 기지 ‘캠프 롱’을 탐색한다. 폐허가 된 공간과 연관된 데이터들을 조합하여 추적하던 중,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모든 시간 속 지도 위에 새겨져 있는 유령 같은 존재, ‘캠프 롱 ATM’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은 실제로 캠프롱에서 근무했던 작가의 조부의 경험에서 착안했다. 20년 넘게 방치됐던 기지를 방문하며, 공적 기록(역사)와 사적 기록의 차이, 조부가 찍었던 사진과 아카이브된 사진의 차이에 집중했다. 굴절되어가는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조용한 선박들>(2023)은 기술의 상징이자 전쟁의 상징인 ‘철’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던지고 있다. 작품은 베트남을 방문해 다크 투어에 참여했던 작가의 경험이 계기가 됐다. 작가는 남베트남군 출신이던 가이드를 보고 몸과 목소리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몸에는 남베트남군 출신으로서의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인데, 그의 목소리는 베트남에서 주입되었고, 또 가져야만 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 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각종 시각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을 수집, 조합하여 ‘보기’를 시도하였던 전작들과 달리, 직접 촬영한 사진을 포함한 사진 매체를 통해 한 장소의 과거와 현재를 비춘다. 베트남의 ‘DMZ 다크투어’에 나선 화자를 따라, 작품은 베트남 전쟁의 주요한 장소들을 투어리스트의 사진과 투어 가이드이자 참전 용사인 ‘민’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한다. 전장에서 관광 상품으로, 뒤바뀐 풍경 앞에서 화자는 단단한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휘어질 수 있는 강철을 떠올린다.

전시는 무료로 진행되며, 일요일·월요일·설연휴는 휴관, 오전 11시부터 19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자세한 정보는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www.doosanartcenter.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