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국립무용단, ‘국가브랜드 작품’ 기대해도 좋은가
[성기숙의 문화읽기]국립무용단, ‘국가브랜드 작품’ 기대해도 좋은가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4.01.23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무용단 60년의 창작 여정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국립무용단 창단의 문화론적 함의

모든 제도의 창출은 당대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다. 1962년 국립무용단 창단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당시 무용인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건의한 「최고 회의에 올리는 공개 건의」라는 문건은 한국 최초의 국립무용단체 창단에 불을 댕겼다. 

대체로 수동적 자세에 익숙한 무용인들이 정부의 무용 육성 방안을 제시한 문건에 정책적 제도 마련의 일환으로 국립무용단 창단이라는 획기적인 국가 시책을 요구하고 나선 것 자체가 새삼 놀랍다. 일제강점~해방~6.25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은 무용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이렇듯 절박한 시대적 상황에서 무용 발전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현실론이 대두되었다.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국립무용단 창단은 조국근대화를 표방하고 출범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5.16 혁명을 통해 제3공화국을 개막한 정부는 쿠데타로 인식되는 정권 이미지를 탈색하기 위해 민족 고유의 전통과 주체의식을 토대로 이른바 ‘문화주의’를 내세운다. 사회통합을 위한 국가이데올로기 구현과 자주적 문화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문화예술 부문에서도 공적(公的) 제도화가 추진되었다. 국립무용단의 창단은 이른바 공적 제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화론적 함의를 지닌다.   

1962년 창단된 국립무용단은 한국 국공립무용단의 효시라는 점에서 의미롭다. 그런데 창단이후 10여년은 뚜렷한 예술적 정체성이 부재한 가운데 일종의 모색기로 간주된다. 신무용, 발레, 남방춤, 스페인춤 등 다양한 무용장르가 공존한 가운데 신무용 제2세대 무용인들이 주도했다. 직업화를 목표로 했으나 단원들의 신분은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에 머물렀다. 이렇듯 초기 국립무용단은 일종의 프로젝트시스템으로 존재했다.   

국립무용단, ‘한국적 무용극’의 산실

1973년 국립극장의 ‘장충동 시대’가 개막되면서 국립무용단 또한 변곡점을 맞는다. 남산 자락에 터 잡은 국립극장을 통해 국립무용단은 관(官) 주도 전문무용단체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갖는다. 다장르 무용에서 한국무용 전공의 국립무용단과 발레 전공의 국립발레단으로 이원화되면서 송범과 임성남이 각각 실질적 리더로 부상한다. 국립무용단은 민족문화의 정체성 구현을 예술적 이념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조택원의 제자인 송범은 30여년 간 국립무용단을 이끌면서 유의미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

국립무용단을 통한 송범의 예술적 성취는 ‘한국적 무용극’으로 집약된다. 그의 무용극 지향의지는 남산 국립극장 개관과 맞물려 싹터 나왔다. 국립극장과 같은 대형무대를 채우기엔 기존의 신무용 계열 소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주효했다. 특히 무용평론가 조동화는 “국립극장과 같은 대형무대에서 할 수 있는 춤이란, 결국 극(劇) 형식 밖에 없다”는 논리로 송범의 무용극 지향의지를 부추겼다.

조동화의 선구자적 예지력이 한국적 미(美)의 전형을 담지한 송범 스타일의 무용극 형식을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범식 무용극 스타일이란 우리의 신화, 전설, 설화 등을 소재로 한 서사의 나열, 한국적 춤사위 및 미적 정서를 서양 고전발레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왕자호동’(1974)을 비롯 한국적 무용극 3부작으로 평가되는 ‘도미부인(1984), ‘은하수’(1986), ‘그 하늘 그 북소리’(1991) 등이 창작되면서 국립무용단의 무용극시대가 화려하게 꽃피웠다.  

한국적 무용극의 산실로 자리매김된 국립무용단의 변화 조짐은 1992년 송범 퇴진과 더불어 찾아왔다. 송범에 이어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발탁된 조흥동은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화제를 모았다. 우리 춤의 원초적 심미성에 토대한 전통춤 고유의 질감을 살린 작품창작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최현은 한국 최고의 남성춤꾼이자 영화배우로 활약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로 기대를 모았으나 8개월 정도의 짧은 재임으로 예술적 성과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최현에 이어 예술감독에 오른 국수호는 심신에 체화된 고유의 전통자산과 동양 중심적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스펙터클한 공연미학과 총체적 극장예술을 지향하는 소위 ‘춤극’을 표방했다. 다만, 스승 송범이 추구한 한국적 무용극의 답습이거나 윤색에 머물렀다는 평가도 있다.

예술적 정체성의 실종, 위기 봉착

엄밀한 관점에서 살피자면, 국립무용단의 무용극적 전통은 배정혜·김현자 예술감독 시절에 이르러 방향이 선회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배정혜·김현자의 예술적 정체성을 반추하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한국창작춤 제1세대에 속하는 두 사람은 현대화된 급진적 스타일의 창작을 지향한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예컨대, 배정혜는 ‘바(bar)기본’이라 불리는 독창적 매소드를 토대로 국립무용단 무용수의 역량 강화를 꽤하여 나름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장현수, 김미애, 최진욱, 이정윤, 조재혁 등 스타무용수 발굴을 통한 ‘춤 춘향’(2002), ‘soul, 해바라기’(2006) 등 수작을 남겼다. 작품의 레퍼토리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한편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국립무용단의 외연 확장에 기여했음은 분명 평가할 부분이라 여겨진다. 

한편, 국립무용단 역사상 가장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안무 성향을 추구한 예술감독은 김현자라 할 수 있다. 특유의 시적 감수성과 서정적 탐미주의를 추구한 김현자의 안무세계는 기존 국립무용단이 지향한 한국적 무용극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집요한 안무근성에 힘입어 탄생된 ‘바다’(2003), ‘비어있는 들’(2003), ‘매창(梅窓)-매화, 창에 어리다’(2005) 등은 국립무용단의 작품 목록을 튼실하게 살찌웠다.

추측하건대, 배정혜·김현자 이후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위상은 견고하게 터 잡지 못하고 서성댄 듯 보인다. 윤성주 예술감독 시절부터 그 징후가 포착된다. 예술감독 자신의 작품 창작보다는 외부 안무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안무의 주도권을 현대무용가에게 의탁한다든지, 해외 안무가에게 내줌으로서 무용계 안팎에서 바라보는 경계의 눈초리를 자초한 감이 없지 않다. 현대무용 안무 비율이 절반에 이른다는 지표는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정체성이 몹시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2015년에 안무된 ‘향연’은 국립무용단 간판을 내걸었음에도 작품 창작에 참여한 주요 아티스트 대부분이 외부 전문가라는 점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작품 ‘향연’(2015)은 한마디로 ‘문제작’에 속한다. 제작비 관련 ‘불편한 진실’이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향연’은 과거 음습한 터널을 배회하는 형국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초연 당시 ‘향연’ 안무에는 조흥동·김영숙·양성옥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대기업 론칭 의류 상품으로 성공을 거둔 사업가이자 의상디자이너인 정구호가 무용작품의 연출과 무대미술을 맡는다는 사실에 주목도가 높았다. 

‘향연’에 담지된 한국적 미감을 한껏 살린 격조있는 공연문법은 새로운 시각의 ‘전통의 재발견’ 사례로 호평되었다. 입체적 조형성 및 전통과 현대성이 조화를 이룬 무대적 세련미는 대중몰이에 성공하는 견인차가 됐다. 다만, 우리 춤 고유의 미감이 반감된 춤사위는 실망감을 안겨줬다. 의상에 그 원인이 있었음은 퍽 역설적이다. 일명 ‘항아리치마’로 인해 하체 굴신동작은 물론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이 빚어내는 버선코의 아름다움이 가시권에서 멀어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재론하자면, ‘향연‘은 국립무용단에 축적된 우리 춤의 풍부한 재료들이 현대인의 미적 감수성을 정확히 간파한 정구호라는 예사롭지 않은 심미성을 소유한 의상디자이너를 만나 고품격의 ‘종합선물세트’로 재가공된 결과의 산물이 아닐까? 작품 ‘향연’이 성공했다면 그 절반은 탁월한 미의식과 초절정 공간미학 그리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논리에 최적화된 의상디자이너 정구호에게 연출 및 무대미술 혹은 포괄적 의미의 안무에 해당하는 창작의 주도권을 내준 결과일 것이다. 

‘국가브랜드 작품’ 창작에 주력해야   

윤성주 이후 2016년을 기점으로 김상덕, 손인영이 차례로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다. 춤아카데미즘 세례를 받은 한국창작춤 제2세대 무용가들라는 점에서 나름 기대가 컸다. 그러나 전반적인 예술적 성과는 저조하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편향된 미의식에서 기인된 안무력의 절대빈곤이 낳은 필연적 한계라든가 혹은 근거 없는 우월감에 경도된 자아도취적 엘리트주의의 한계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물론 다른 이유도 부언된다. 역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되는 대통령 탄핵, 블랙리스트 사건 등 요동치는 정세 속에 국립무용단 또한 직간접 영향권에 있었다고 봐진다. 아울러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까지 출몰하여 대내외적으로 순탄치 않은 예술 환경에 놓여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만한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국립무용단의 ‘위기’를 반증한다. 

최근의 침체 혹은 위기 극복을 위해 국립무용단은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우선, ‘국립(國立)’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국가브랜드 작품 창작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 스스로 안무의 주도권을 쥐고 주체적 입장에서 국립무용단 고유의 예술적 정체성이 투영된 국가브랜드 작품을 창작해야 할 때이다. 

지난해 11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무용인 현장간담회에서 국공립무용단 예술감독의 ‘자기작품’ 안무 의무화 및 사후 평가제 도입을 통한 혁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립예술단체로서 공적인 책무 이행과 함께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 구현을 주문한 것이다. 김종덕 현(現)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의 어깨가 무겁다. 그의 창작 행보를 새삼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