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카게에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 《오사카 파노라마展》…“빛과 그림자로 보여주는 환상적인 동화세계”
[현장스케치] 카게에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 《오사카 파노라마展》…“빛과 그림자로 보여주는 환상적인 동화세계”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2.0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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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7, 세종문화회관
‘100세 작가’의 순수한 동심 세계로의 초대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올해로 100세를 맞이한 일본의 원로작가가 특별한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세종미술관에서 4월 7일까지 그림자 회화(카게에) 거장으로 불리는 일본 작가 후지시로 세이지의 전시가 열린다.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중인 후시지로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중인 후시지로

그는 지난달 25일 기자간담회를 위해 전시장을 찾았다. 조용히 작품을 응시하던 작가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그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그를 마치 어린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그와 함께 이따금씩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려오는 고요한 전시장을 둘러보는 시간은 그야말로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번 전시는 그의 한 세기에 걸친 빛과 그림자의 파노라마를 선보인다. 특히 조선 설화를 다시 읽고 재제작한 <선녀와 나무꾼> 작품 시리즈 14점과 6m가 넘는 초대형 작품을 비롯한 2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일부 연작 작품들은 이야기 설명을 곁들여 신비로운 서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신비한 작품들과 각각의 작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화책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할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서 본인의 글을 가만히 바라보는 후지시로
▲전시장 입구에서 본인의 글을 가만히 바라보는 후지시로

그림을 사랑했던 소년, 후지시로 세이지

후지시로 세이지는 모든 인류가 이 땅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메시지를 담아 작업해 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채 그림만 그리곤 했다. 오오카야마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런 그를 걱정한 어머니는 "이렇게 그림만 그려도 되는지"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같은 반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즐거워하고, 잘 웃기도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후지시로는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 예과에 입학 후 ‘팔레트 클럽’이라는 그림 동아리에 들어갔다. 동아리방 옆은 ‘아동문학연구회’가 있었고 인형극 등을 했다. 후지시로는 이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팔레트 클럽에서 1년 선배인 이나무라 다츠하루(稲村立春)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는 전형적인 게이오 보이(일본의 명문사학인 게이오 (慶應) 대가 운영하는 게이오 유치원, 초.중.고교와 게이오대를 거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후지시로는 그에게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과 참신한 색감을 배웠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왔던 이나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 후지시로는 이제야 이 평화로움 속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전쟁 중에는 배급이 원활하여 쉽게 구할 수 있던 물감이 전후에는 구하기가 어렵게 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빛과 그림자만 있으면 가능한 카게에 작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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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줄을 당기면 움직이는 작품과 작품 앞으로 물이 흐르는 연출

거장의 탄생을 예고한 흑백의 시대 

1947년 종전 후 대학을 졸업한 후지시로가 입사한 첫 직장은 영화배급사였다. 회사 일도 해가면서 그다음 해에는 쿠라시노테쵸우(暮しの手帖, 삶의 수첩)이라는 여성지에 카게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 때 지면으로 처음 실려 세상에 공개된 게 <완두콩 다섯 알>이다. 이땐 물자 부족으로 철사나 굴러다니는 물건을 이용해 카게에를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초토화가 된 도쿄에서 구할 수 있던 것은 골판지나 전구 따위가 전부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일본은 여전히 정전이 잦았고, 그는 카게에를 제작하며 어둠 속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았다. 그는 십 대에 이미 일본의 독립미술협회전, 국화회전, 춘양회전, 신제작파전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지만, 카게에에만 전념했다. 이후부터 그의 작품 활동은 상업과 예술의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지기 시작했다.

NHK 일본 공영방송국 개국 방송 시, 그의 극단 <모쿠바자>가 전속으로 채택되었고, 1960년대 비틀즈가 최초 아시아 투어를 마친 부도칸에서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 케로용이 등장하는 <케로용 쇼>가 열렸다.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의 광고에는 <포도주 병의 여행> 카게에가 사용되었고, 날씨 예보, 공익광고를 비롯한 상업광고에도 그의 작품이 등장했다. 쿠라시노테쵸우의 표지와 내지에도 그의 작품이 사용되었으니 작가로서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고도성장기 일본 대중문화예술 발전의 중심에는 후지시로 세이지가 있었다. 
 
그림자 회화 장르를 개척한 후지시로 세이지는 일본에서 100회 이상의 순회 전시 개최, 그림자극의 상연 횟수만도 2,000회가 넘는다.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그림자극으로 상연한 작품은 일본 문부과학성이 공인한 특별 선정작이 됐다. 

▲오스카 와일드의'행복한 왕자'를 그려낸 작품
▲오스카 와일드의'행복한 왕자'를 그려낸 작품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특별한 한국전

이번 <오사카 파노라마展>은 그의 역사적 발자취를 담은 작품들과 그가 애정을 담아 아끼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후지시로가 전시 도면도 직접 그려서 그 의미를 더한다. 그는 이번 한국전이 가장 의미를 두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전시라고 밝힌 바 있다. 

모노크롬 시리즈 <서유기>와 <목단기> 시리즈를 비롯해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세계적인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소재로 한 <첼로 켜는 고슈>, <은하철도의 밤>, <구스코부도리 전기>등이 소개된다. 또한 우리 국민에게도 친숙한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등 일본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카게에 소재는 다름 아닌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들이다. 겐지의 동화가 극으로도 그림으로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시절, 후지시로는 겐지의 동생이자 겐지 연구가인 미야자와 세이로쿠의 허락을 받아 카게에 극을 상연했다. 초연은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였으며 그 후로도 1,000회 이상 상연하였다. 

후지시로의 카게에와 극에 있어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는 성장의 동력이 됐다. 겐지 동화가 <은하철도의 밤>에 의해 기도의 동화라고 불리게 됐다면 후지시로의 카게에는 <은하철도의 밤>에 의해 빛과 그림자의 기도라는 예술관을 확립하게 됐다. <은하철도의 밤>을 소재로 한 그림책은 1983년 브라티슬라바 국제그림책원화전BIB의 최고상을, 그림자극으로는 1982년 예술제의 우수상을 수상했다. 

▲'선녀와 나무꾼'시리즈 앞의 후지시로
▲'선녀와 나무꾼'시리즈 앞의 후지시로

후지시로가 영사하는 '선녀와 나무꾼'

후지시로는 이번 한국 전시를 앞두고 열흘에 걸쳐 <선녀와 나무꾼> 열두 작품을 새로이 제작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1958년에 다섯 작품을 제작하고 1973년에도 이 작품을 동화로 엮어 발행한 바 있다. 당시 일부 원화들이 작품 촬영 등을 계기로 유실됐고, 후지시로는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해 11점을 추가로 제작해 완성했다. 

1948년부터 잡지 '쿠라시노테쵸우'에 후지시로 세이지의 카게에가 동화로 소개됐다. 1973년에는 잡지에 실린 카게에 동화를 모아, 「お母さんが読んで聞かせるお話_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두 권으로 삶의 수첩사에서 출판했다. 이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조선의 설화 두 편이 실려 있다. A권에는 동물의 보은을 담은 내용이자 개와 고양이의 사이가 멀어진 유래가 담긴 [개와 고양이와 구슬_1962년]을 B권에는 [선녀와 나무꾼_1958년]을 담았다. 후지시로가 카게에로 화폭에 담은 [선녀와 나무꾼], [개와 고양이와 구슬]은「鹿からもらったお嫁さん_사슴이 맺어준 색시」「竜王国へ行ったおじいさん_용궁으로 간 할아버지」로 제목을 붙여 소개했다. 

▲평화로운 풍경을 담은 작품 앞을 호수처럼 연출했다.
▲평화로운 풍경을 담은 작품 앞을 호수처럼 연출했다.

100세 작가가 전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젊은 시절에는 동화 세계와 자신의 심상心象, 풍경 등을 주로 그렸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과 지구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되었다. 각지에 시대를 초월하며 남아 있는 절과 성, 그리고 바다와 산, 강과 숲은 분명히 내가 생각해 만들어 내는 것 그 이상으로 아름답다. 더욱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어 각 지방의 경치를 데생한다든지 카게에 작업을 했다.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지진을 실제 눈으로 보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에 의해 부서진 피해지역, 거기에는 슬픔과 분노와 그리움, 인간 삶의 많은 것들이 파편으로 남아 있었다. 지구는 그대로다. 인간은 극복해야만 한다. 피해지역에 남아 있는 풍경 속에는 단지 자연의 풍경 그 이상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있다. 재앙의 현실을 기록하는 작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극복하고, 위로하고 또 미래의 희망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노트 中

올해로 한 세기의 삶을 맞이한 거장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과 평화다. 그는 "이번 전시가 한·일 양국 간의 관계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라며, "한 세기에 걸친 사랑·평화·공생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한국 관객들의 마음에 닿길 바란다"라는 100세 현역작가로서의 소회를 밝혔다.

전시는 전체관람가로 진행되며, 티켓은 성인 2만원, 청소년 1만 5천원, 어린이 1만원에 구매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