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바흐가 한달 동안 구속됐다니?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바흐가 한달 동안 구속됐다니?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2.0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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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베토벤은 바흐의 <평균률 클라비어 곡집>을 접하고 이렇게 썼다. “바흐는 ‘시냇물’(Bach)이 아니라 큰 바다(Meer)라 불러야 한다!” 바흐는 루터교의 음악 전통은 물론 유럽의 모든 새로운 조류를 흡수, 바로크 음악의 절정을 꽃피운 작곡가로 꼽힌다. 비발디를 위시한 이탈리아 협주곡에서는 ‘합리적 형식, 절제된 테마, 부드러운 멜로디’를 배웠다. 프랑스에서 추방된 위그노 교도에게는 프랑수아 쿠프랭 등 화사한 프랑스 궁정음악을 전수받았다. 그는 헨리 퍼셀, 조지 헨델 등 등 영국에서 활약한 대가들의 음악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독일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지만, 온 유럽이 그를 향해 흘러 들어와서 음악의 바다가 됐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말했다. “만일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한다 해도 바흐의 <평균률 클라비어 곡집>만 있다면 모두 재건할 수 있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데 토를 달면 불경스런 일이 될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바흐에 대해서 어설프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냥 입 다물고 음악을 들으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장님 코끼리 더듬듯 경험한 나름의 바흐에 대해 이야기할 자유를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3번 C장조를 거장 안드레 세고비아가 A장조의 기타 모음곡으로 편곡한 것*을 듣고 처음으로 바흐 음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첼로로 연주한 원곡은 이렇다 할 화음 없이 선율만 구불구불 흘러가기 때문에 건조하고 지루하게 들렸지만 기타로 연주한 것은 각 음들의 여음(餘音)이 분산화음을 이루기 때문에 쉽게 감성을 건드렸다. ‘슈가코팅’된 바흐라고 할까.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중 프렐류드 (기타 편곡 및 연주 : 안드레 세고비아)
 

세고비아가 연주한 바흐 선율은 검은 바탕에 펼쳐지는 하얀 선들의 춤으로 다가왔다. 프렐류드는 신선의 독백 같았고, 이어지는 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부레, 지그 등 춤곡들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파블로 카잘스, 모리스 장드롱, 피에르 푸르니에, 엔리코 마이나르디 등 위대한 첼리스트들의 연주로 원곡을 들으니 비로소 원곡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바흐 음악이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은 클래식 기타 연주판을 먼저 들으셔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 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골트베르크 변주곡, 이탈리아 협주곡 등으로 곡목을 넓혀 나가며 바흐와 친숙해졌다. 줄리언 브림이 연주한 바흐의 류트 모음곡 1번도 좋았다. 바흐는 두 살 아래의 류트 연주자 레오폴트 바이스(Leopold Weiss, 1687~1750)와 만년에 친구가 됐고, 그 인연으로 네 곡의 류트 모음곡을 작곡했다. 

바흐 류트 모음곡 1번 E단조 (기타 줄리언 브림, 프렐류드-알레망드-쿠랑트-사라방드-부레-지그)
 

바흐의 시대, 음악가는 귀족과 성직자의 하인이었고, 이 봉건적 위계는 바흐의 전생애를 규정했다. 바흐는 한때 이 체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흐의 생애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 세 개를 기억하고자 한다. 

1. 바이마르에서 한 달 동안 구속당하다

바흐가 구류를 살았다니, 기가 막히지 않는가! 불같은 성격으로 타협을 모르는 젊은이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주로 칸타타와 오르간곡을 작곡했다. 이 시절 궁정 악단을 지휘하던 바흐는 성의 없이 연주하는 파곳 주자를 모욕하여 결투를 벌인 일도 있고, 시원찮은 오르간 연주자에게 가발을 벗어 던지며 “차라리 구두 수선공이 되라”고 소리친 기록도 있다. 이 무렵 작곡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는 바흐가 얼마나 열정적인 젊은이였는지 짐작케 한다. 

바흐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 (오르간 헬무트 발하)
 

바이마르 영주 빌헬름 에른스트가 자신을 진급시키지도 않고 자유롭게 놓아주지도 않자 바흐는 몰래 쾨텐의 일자리를 알아보았고, 이 때문에 ‘명령 불복종’ 죄목으로 한 달간 구류를 살았다. 조병선씨에 따르면 이 때 감옥 안에서 스케치한 게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인데, 바흐는 이 곡들로 예수의 전 생애를 묘사하려 했다고 한다. 바흐는 언제나 악보에 ‘S. G. D’(Soli Gloria Deo, 오직 신의 영광)이라고 써 넣었다. 엄격한 신분질서에 절망하면서 오직 신앙으로 자신의 열정을 다스려야 했고, 개인의 열정을 우주의 질서에 복속시키는 ‘질서 속의 자유’를 음악에서 추구했다는 것이다. (조병선 <클래식 법정> pp.170~176)

2. 쾨텐에서 ‘유기견’이 되다

1717년 12월 2일 석방된 바흐는 행복한 ‘쾨텐 시대’를 맞게 된다. 쾨텐의 영주 레오폴트 후작은 아름다운 바리톤 음성의 소유자였고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클라비어를 연주할 줄 알았다. 17명으로 된 우수한 악단을 운영한 그는 악단의 일원으로 연주에 참여했으며, 새 악장 바흐를 극진히 우대했다. 바흐는 그를 가리켜 “음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음악을 아는 후작”이라고 칭찬했다. 쾨텐 궁정이 캘빈파여서 복잡한 교회음악을 금지한 점은 오히려 기회였다. 바흐는 종교음악 작곡의 의무에서 풀려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등 기악곡들을 맘껏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쾨텐 시절도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1721년, 군비 확장 때문에 쾨텐 궁정의 음악 예산이 축소되고, 레오폴트 후작의 새신부 프레데리카 헨리에타가 음악을 싫어하는 게 분명해지자 바흐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주인의 사랑을 받다가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 냉정하게 버림받는 반려견처럼, 쾨텐의 바흐도 주인의 변덕으로 버림받고 만 셈이다. 

3. 라이프치히에서 묵묵히 굴욕을 감내하다 

바흐는 1723년 라이프치히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임명되어 그 곳에서 생애 마지막 27년을 보냈다.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학교 책임자들과 검열관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13개조의 까다로운 계약서에 서명을 요구했고, 쾨텐 궁정에서 ‘해고 증명서’를 떼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텔레만, 그라우프너, 파슈 중 한명을 후임자로 영입하려 했던 시의회는 여의치 않자 ‘2류’로 간주되던 바흐를 뽑았다. 시의원 아브라함 플라츠는 “우리는 최고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간 정도의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바흐는 음악뿐 아니라 학생들의 라틴어 교육, 식사 예절 등 온갖 궂은 일을 떠맡아야 했다. 바흐는 충분치 못한 수익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묵묵히 굴욕을 감수했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를 위해 일주일에 평균 한 곡씩, 도합 295곡의 칸타타를 썼다. 당시 예배는 4시간 정도 걸렸는데, 일요일과 축일에는 언제나 새로운 칸타타를 연주해야 했다. 이 끔찍한 의무 때문에 바흐의 엄청난 양의 칸타타가 세상에 나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