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Library] 행복할 수 있나요?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
[Human Library] 행복할 수 있나요?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
  • 독립기획자 현정해
  • 승인 2024.02.0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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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살아가나?”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좋아하는 게임을 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가족들과 근사한 곳에 가기 위해.’ 10살짜리 아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말했다. 그날 선생님의 답은 ‘행복하기 위해서’였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할 때, 좋아하는 곳에 갈 때,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행복하다’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존재해서야 되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은 관객으로 하여금 ‘미나토’를 괴롭히고 그의 삶을 헤집어 놓는 괴물 찾기에 참여하게 한다. 1부에서는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의 시선에서, 2부에서는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 ’호리‘의 시선에서 등장인물들을 괴물이라 의심케 만든다. 관객들은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진심 어린 사과조차 하지 않는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분노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누명을 써서 억울해하는 호리 선생을 동정하기도 한다. 3부에서야 비로소 미나토와 친구 ‘요리’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관객들은 자신이 그렇게도 찾던 괴물이 그 누구도 아니었다고 느낀다.

우리는 요리를 친구, 어쩌면 그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하고, 교장 선생님께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까 봐 말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미나토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자격이 있나? 태풍이 지나간 후, 이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미나토와 요리를 보고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나? 단편적인 시선에서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잘못된 행동을 반복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미나토와 요리에게는 재앙과 같은 물, 불의 연속일 테다. 괴물은 누구인가?

의심의 눈초리를 여기에서 저기로 쉴 새 없이 휘두르며 괴물을 만들려는 우리가 괴물이 아닌가. 이것 아니면 저것. 무엇이든지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회, 엄격한 잣대를 내세워 둘로 구분하는 사회가 괴물이 아닌가. 자신이 그어놓은 선 바깥의 사람들을 괴물이라 칭하며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을 멈춰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을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짓밟는 사회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전제되어야 구성원들이 존중받고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보통의’, ‘평범한’ 따위의 말들로 누군가의 행복을 앗아가서도 안 된다. 의도하지 않은 말들이 칼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 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가해지는 수많은 폭력과 억압은 더 깊이 남아 오래도록 그들을 괴롭힌다. ‘나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헤아릴 수 있다.’라는 생각을 부끄럽게 만들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화 ‘괴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

이 질문에 모두가 다른 답을 하듯이,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모두 다른 답을 내놓는다. 무수히 많은 답은 있어도 정답은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모두가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틀을 깨부수고 참된 나의 모습으로 자유를,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하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