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연기처럼 모호한 기억의 풍경, 학고재 장재민 개인전 《Line and Smoke》
[현장스케치] 연기처럼 모호한 기억의 풍경, 학고재 장재민 개인전 《Line and Smoke》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2.16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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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감정, 시간의 중첩이 그린 풍경
첫 개인전 이후 10년만에 유화에서 아크릴릭 구아슈로
“쉼 없이 그리며 관성이 된 것들을 바꾸기 위해, 모험을 해야했다”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화가가 재료를 바꾼다는 것은 언어를 바꾸는 것과 같다. 묵직한 유화를 재료로 풍경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오던 장재민이 아크릴 구아슈로 재료를 바꾸고 새로운 작업 방식과 함께 돌아왔다. 2020년, ‘부엉이 숲’ 이후 3여 년 만에 학고재에서 장재민의 개인전 《Line and Smoke》가 열렸다. 내달 2일까지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장재민의 새로운 모험의 결과물 22점을 만나볼 수 있다.

'깊은 웅덩이 끝' 작품 앞에 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장재민 작가의 모습이다.
▲‘깊은 웅덩이 끝’ 작품 앞에 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장재민 작가의 모습이다. ⓒ김연신 기자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화하기 마련이라던 작가의 말처럼, 변화를 거친 그의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었다. 기존에는 어릴 적의 어렴풋한 기억, 그 장소의 사진, 마주하고 있는 캔버스를 기준으로 공백을 채워나가는 방식을 취했다면, 이제는 상상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각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번 전시 작품인 <깊은 웅덩이 끝>의 경우, 제주 쇠소깍을 방문했던 막연한 기억과 감정을 모호하게 뒤엉킨 필선들로 형상화했다. 이처럼 작가는 낯선 감각에 주목해 다른 중력이나 현실과의 거리감, 그 깊이감과 무게감을 직접 감각하며 화폭에 옮긴다.

유화에서 아크릴릭 구아슈로

오랫동안 사용해온 재료를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가는 “쉼 없이 그리며 관성이 되어버리는 것들을 바꾸기 위해서 모험을 해야했다”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고, 많은 작품을 버려야 했다. 그 고통은 모국어를 버리고 낯선 언어를 새로 습득하는 것과도 엇비슷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변화를 선택했고, “마침내 허공에 떠다니는 듯한 감각을 표현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아 만족한다”라고 말한다.

수성 매체인 구아슈는 빨리 마르기 때문에 작가의 손짓이 여실히 드러나고, 수분에 따라 물성을 얕고 부드럽게 쌓을 수 있어 유화와는 다른 결의 매트한 층위를 구현할 수 있다. 구아슈의 이러한 특징은 붓의 운동성을 드러내 화면을 개방하고, 은유의 테두리 밖에서 서성이는 미지의 서사를 감지하게 한다.

문소영 큐레이터, 전시 서문 장재민 개인전: 라인 앤 스모크.

아크릴 구아슈는 매트한 질감과 투명하게 중첩되는 특성이 두드러지는 재료다. 작가는 그 특성을 통해 선들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표현 방식을 채택할 수 있었다. 빠른 필치로 쌓아나가는 얇은 레이어들은 ‘시간의 중첩’과도 같이 모호하게 겹쳐지며 뭉근한 깊이감을 자아낸다.

장재민 작가가 ‘먼 곳의 밤’작품을 천장에 매달아 부유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한 연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재민 작가가 ‘먼 곳의 밤’작품을 천장에 매달아 부유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한 연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연신 기자

꿈처럼 모호한 시간과 장소의 교차

장재민은 장소를 상상하고, 시간을 그린다. 장재민에게 회화란 다중적인 시간과 감정의 교차점이다. 그는 장소와 기억, 그 때의 감정들이 쌓인 ‘시간의 중첩’에 집중한다.

시간을 통해 원래의 경험에서 분리된 기억들은 작업 속에서 추상처럼 드러나기도 하고, 구름처럼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형체로 그려지기도 한다. 화면 위의 이 형상들은 지표라기보다는 징후로서 결말을 열고, 풍경 속에 고여 있던 시간을 전시 공간으로 퍼져 나오게 한다. 

문소영 큐레이터, 전시 서문 장재민 개인전: 라인 앤 스모크.

그의 작품은 현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상상으로 그려진 풍경들이다. 그는 “채워 넣지 않는 부분, 캔버스보다 더 넓은 영역을 상상하며 그리며 관객 역시 화면에 옮기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의도로 작품을 천장에 매달아 공중에 띄워두기도 했다. 작가가 말하는 ‘부유하는 허공의 감각’과 맞닿아 있는 연출이다. 

작품을 벽에 걸지 않고 비스듬하게 세워 둔 것은 벽에 걸린 평행한 시간대가 아니라 어긋난 공간감을 줌으로써 상상의 공간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 출발했다. <섬>(2023)은 꿈 안의 꿈처럼 액자식 구조로 분리된 두 세계를 한 폭에 담았으며, <정물들>(2023)은 풍경의 조각들을 모았다. 장재민의 작품에서 풍경과 정물은 모호한 형상이 대상을 해체하듯 다른 풍경 위에 녹아들거나 중첩되기도 한다. 

장재민 JANG Jaemin, 섬 An Islet,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구아슈 Acrylic gouache on canvas, 117x91cm (사진=학고재)
▲장재민 JANG Jaemin, 섬 An Islet,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구아슈 Acrylic gouache on canvas, 117x91cm (사진=학고재)

어둠이 드러내는 것

장재민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을 캔버스 내에 포착해낸다. 취미가 밤 낚시인 작가는, 어둠이 깔린 낚시터에서 덩그러니 혼자 있다 보면 땅과 하늘이 구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때 어둠 속에서 쓰는 시각 외의 감각들의 낯선 느낌을 화폭에 생생하게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이 파악되지 않는 풍경의 모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어둠이 자아내는 모호성을 추구함이 투명한 수성 매체를 사용함에도 작가의 작품이 어두운 빛을 잃지 못하는 이유인가 싶다.

대체로 어두운 색이 주가 되는 작가의 작품은, 색의 중요도가 감소됐을때 드러나는 또다른 조형적 요소들에 집중하는 작가의 방식을 따른다. 작가는 오히려 절제된 상태에서 색이 더 예민하게 드러난다고 느껴, 붓질이나 몸을 쓰는 방식 등을 강조하기 위해 색을 절제하곤 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쓸 수 있는 색과 쓸 수 없는 색을 구분하는데, 신중하게 선택된 색들은 장면에서 시간성, 온도, 낮과 밤을 지우는 대신 그곳에 맴도는 공기를 드러낸다. 

전시 제목 ‘라인 앤 스모크’처럼, 장재민은 연기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감각과 서사를 가변적으로 공간에 부유하게 하고, 체화된 형상을 운동성 있는 획으로써 포착한다. 작품은 뉘앙스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관객에게 맡기고자 하는 방식을 취하며 풍경과 전시장을 연결한다. 관객은 이번 전시를 통해 모호한 풍경과의 접속, 흐릿한 기억과의 조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