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순백색의 솔올미술관, 루치오 폰타나展으로 화려한 개관
[현장스케치] 순백색의 솔올미술관, 루치오 폰타나展으로 화려한 개관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2.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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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건축’ 대가 리처드 마이어 디자인
루치오 폰타나, 국내 미술관 전시로는 최초
곽인식展, ‘세계미술과 한국 미술을 연결’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지난 19일, 바닷내음과 솔향이 어우러지는 강릉시 교동의 소나무 언덕 위, 솔올미술관을 찾았다. 개관부터 잡음이 많았지만, 햇살을 가득 머금은 순백의 공간은 개의치 않고 찾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녹여주는 듯 했다.

▲솔올미술관 외관전경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그 자체로 작품, ‘마이어 파트너스’ 건축

솔올미술관은 리차드 마이어가 설립한 건축회사, 마이어 파트너스(Meier Partners)의 건축 작품이다. ‘백색 건축’으로 유명한 리차드 마이어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 로스앤젤레스의 게티센터, 프랑크푸르트의 응용미술관, 애틀란타의 하이뮤지엄 등 유명 미술관을 다수 디자인한 거장이다. 그의 철학이 녹아 있는 솔올미술관은 간결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화이트 뮤지엄으로, 전면을 유리로 구성해 순백색으로 빛나는 모습이었다.

미술관이 위치한 강릉시 교동의 옛 이름은 ‘솔올’로, '소나무가 많은 고을'을 뜻한다. 강릉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소나무 언덕 위에 자리잡은 백색의 건축물은 등대처럼 우직하게 서있었다.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백설기처럼 하얗고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미술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미술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3221.76㎡ 규모로, 해발 62m 높이에 위치해있으며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은 미술관과 연결돼 있으며, 미술관 내부에서는 산맥이 펼쳐진 파노라마 뷰를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 2층에서 보는 강릉 시내 전경.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솔올미술관
▲미술관 2층에서 보는 강릉 시내 전경.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의 건축 디자인은 한국의 유교적 예술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형태와 재료, 구성의 단순함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점에 뒀다. 건축물과 주변을 조화롭게 연결하고 내부 공간과 주변 환경 간의 개방된 소통에 주목했다. 외부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했고, 내부는 채광을 적절히 활용해 예술 작품을 위한 배경이 될 수 있도록 내부 지향적으로 구성했다.

미술관은 한국 전통 건축의 영감을 받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세 개의 파빌리온이 감싸도록 설계됐다. 웅장한 볼륨감을 자랑하는 캔틸레버의 북쪽 윙(North Wing), 전시실과 사무실이 위치한 큐브, 그리고 주 출입구와 카페가 위치한 중앙의 투명 파빌리온으로 이뤄져 있다. 건물과 조경의 일부인 시그니처 램프는 내부와 외부, 두 층을 연결하는 중요한 조각적 요소로,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머무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미술관 내부에서는 주변 경관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 유리로 들어오는 빛이 자연스럽게 내부에 확산되고, 각 전시실은 전시 특성에 맞춰 채광과 조명의 변화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마이어 파트너스의 연덕호 파트너는 “솔올미술관이 예술 작품의 완벽한 배경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멋진 풍경 속에 자리한 솔올미술관이 겸손하고 서정적인 미술관이 되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우리 팀의 비전이었다"라고 밝혔다.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e), 1964, 캔버스에 수성 페인트, 베기, 81 x 100 cm. 루치오 폰타나 재단, 밀라노 (사진=솔올미술관)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e), 1964, 캔버스에 수성 페인트, 베기, 81 x 100 cm. 루치오 폰타나 재단, 밀라노 (사진=솔올미술관)

작품에서 공간으로, 《루치오 폰타나: 공간·기다림》

솔올미술관은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을 연결해 우리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조명’하고자 하는 설립 취지와 함께 개관했다.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의 미학적 연결성을 찾아내어 우리 미술의 미술사적 가치를 세계미술계에 알리는 것을 비전으로 삼았다. 그에 걸맞게 현대미술의 거장 루치오 폰타나와 폰타나의 공간주의와 점점을 갖는 곽인식의 전시로 포문을 연다.

개관전 《루치오 폰타나: 공간·기다림》은 루치오 폰타나를 한국 미술관 최초로 소개한다.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의 기획, 루치오 폰타나 재단의 협력,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과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의 후원이 만난 전시로, 4월 14일까지 개최된다.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는 1964년 「백색 선언」(Manifesto Blanco)을 발표했다. “우리는 예술의 진화를 이어가고자 한다”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폰타나의 강한 의지와 함께 여러 미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백색 선언」을 공개한 이듬해인 1947년, 그는 「공간주의 – 제1차 공간주의 선언」(Spaziali. Primo manifesto spaziale)을 발표하면서 예술적 지향점을 더욱 견고히 드러냈다.

“예술은 영원하지만 불멸할 수 없다. […] 예술은 행위(gesture)로서 영원하지만 물질적으로는 수명을 다할 것이다. […] 우리는 영원이라는 감각을 불멸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미술을 물질로 부터 분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수행된 하나의 행위가 한 순간에 불과하든 천년동안 생명을 이어가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행위가 수행됐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원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 루치오 폰타나, 「공간주의–제1차 공간주의선언문」 중

《루치오 폰타나: 공간·기다림》 전시장 1 전시 전경
▲《루치오 폰타나: 공간·기다림》 전시장 1 전시 전경. 중앙에 ‘자연(Natura)’ 연작이 배치돼 있다. ⓒ김연신 기자

이번 전시는 「공간주의 – 제1차 공간주의 선언」 발표 이후 본격화된 폰타나의 공간주의 미술에 집중했다. 이때부터 작가는 오로지 형태와 색, 소리의 조형성을 공간에 담아내고, 감상자의 움직임을 더해 작품을 4차원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보였다. 그 결과 1947년, 빛을 이용해 공간개념으로 작품을 확장시킨 〈공간 환경〉(Ambiente spaziale) 연작이 탄생했다. 

또한 폰타나는 자신의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을 발전시켜, 전통 회화가 지닌 평면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캔버스에 구멍을 내거나 칼자국을 낸 〈뚫기〉(Buchi)와 〈베기〉(Tagli) 연작을 통해 현실의 물리적 공간을 작품의 미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전시는 전시실1과 전시실2 두 가지 공간으로 나뉘어 있으며, 전시실1은 ‘공간 개념’ 작품들을, 전시실2는 ‘공간 환경’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실 1에서는 1947년 폰타나의 ‘공간주의 선언문’ 발표 이후 제작된 대표작 21점을 만나볼 수 있다. 공간주의를 대표하는 회화 작품인 ‘베기(Tagli)’ 연작, 캔버스에 구멍을 뚫은 ‘뚫기(Buchi)’ 연작, 그리고 돌과 비슷한 형태의 금속을 베거나 뚫어 ‘자연(Natura)’ 이라고 이름 붙인 조각 연작을 선보인다.

미술관 로비 천장에 설치된 백색의 네온 설치물 ⓒ솔올미술관
▲미술관 로비 천장에 설치된 백색의 네온 설치물 ⓒ솔올미술관

전시실 2와 로비에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공간환경 연작 6점을 설치, 각 작품의 원본이 전시된 1940~60년대 당시 공간과 네온 설치를 그대로 재현했다. 관객은 물질에서 나아가 빛과 공간으로 확장된 폰타나의 공간환경 안으로 들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로비 천장에 설치된 백색의 네온 설치물은 1951년 제9회 밀라노트리엔날레에 선보인 대형작품을 재현한 작품이다. 다소 질서정연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순백색의 미술관에 자유분방하게 얼기설기 엉켜있는 곡선으로 새하얀 빛을 흩뿌리며 경쾌함을 선사한다.

김석모 미술관장은 이번 전시 작품에 대해 “1940년대 후반 폰타나가 제안한 혁신적인 공간주의 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펼쳐 보이며,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동시대 미술에 의미있는 미학적 물음을 던진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이번 전시를 협력한 이탈리아 루치오 폰타나 재단(Fondazione Lucio Fontana)은 이번 전시를 두고 “20세기 초에 태어난 혁명적인 예술가의 지속적 영향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In Dialog: 곽인식》展 중 일렬로 배치된 작품들.
▲《In Dialog: 곽인식》展 중 일렬로 배치된 작품들. ⓒ김연신 기자

파고드는 물성, 《In Dialog: 곽인식》

전시실3에서는 《In Dialog: 곽인식》展이 진행된다. 루치오 폰타나 전시와 함께 개최되며 ‘세계미술과 한국 미술을 연결’하고자 하는 솔올미술관의 설립취지를 보다 공고히 하고자 한다. 

‘In Dialog’는 기획전시와 함께 미학적 담론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로, 첫 번째 ‘In Dialog’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미술가 곽인식을 소개한다.
 
1919년 한국에서 태어난 곽인식은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전공했고, 서구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경험했다. 그는 초현실주의, 앵포르멜, 폰타나의 공간주의 등 1950년대 중반 이후 서구 미술의 주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미술언어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이후 1960년대 초 재료의 물질성에 집중한 곽인식은 화면에 변형을 가하거나 돌이나 유리, 철판 등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해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곽인식은 폰타나와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으나, 몇몇 작품은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주의 작업과 미학적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폰타나가 평면성을 벗어나 시공간으로 작품을 확장하고자 캔버스를 찢었다면, 곽인식은 철 구슬로 유리판을 깨뜨리거나 동판을 찢고 다시 봉합하며 사물의 물성에 집중했다. 

두 미술가의 작품은 방법론적 유사성을 가짐과 동시에 작업 세계는 전통과 물질성이라는 주제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폰타나는 물리적으로 유한한 예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공간과 빛, 경험 자체로 작품을 확장시킨 반면, 곽인식은 “사물의 말을 듣는다”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재료 자체에 수행적 행위를 가하며 고유한 감각으로 물성을 깊이 탐구했다.

 

(위) 루치오 폰타나 작품 (아래) 곽인식 작품
▲(위) 루치오 폰타나 작품 (아래) 곽인식 작품 ⓒ김연신 기자

화려한 개막, 그 이후는?

이번 전시작품들 중 루치오 폰타나의 설치 작품들은 전시가 끝나면 재단 측과의 계약 조건에 따라 일괄 파기될 예정이다. 설치 작품들의 원형을 남겨두지 않는 것은 폰타나의 ‘공간 환경’ 작품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김석모 관장은 “로비의 설치 작품이 미술관과 꼭 맞춘 듯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라며, “소장할 순 없더라도 10년, 20년 길게 대여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라고 아쉬움을 표한 바 있다.

루치오 폰타나와 곽인식 전시 종료(4월 14일) 이후에는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국내 최초 미술관 개인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아그네스 마틴은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캐나다 태생의 미국 여성작가다.

전시는 그리드로 표현된 작가의 절제된 미감과 내적 성찰을 보여주며, 즉흥적 제스쳐가 주를 이루던 당시 추상미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작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前 테이트모던 미술관장이자 현 이화여대 초빙석좌교수인 프란시스 모리스(Frances Morris)를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강릉시에서 운영을 맡게 되는 9월 이후의 예정 전시나 운영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내용이 없다. 세계적인 두 거장의 건축과 작품들로 출발하며 세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만큼, 많은 이들이 앞으로도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을 이으며 강릉시를 빛낼만한 전시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