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정지된 시간 속을 유영하다…리움미술관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展
[현장스케치] 정지된 시간 속을 유영하다…리움미술관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展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2.29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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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파레노 작품세계 포괄
신작 포함 40여 점 공개
“공상의 순간은 일종의 마법적인 순간”
“미술관은 닫힌 공간, 틈을 만들고 싶었다 ”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시간의 인식과 경험을 흐리는 작가, 필립 파레노의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이 열렸다. 리움미술관의 전관을 사용할 정도로 큰 규모다. 리움미술관은 필립 파레노(b. 1964) 개인전 《보이스(VOICES)》를 7월 7일까지 개최한다. 지난 2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작가를 직접 만나 이번 전시 기획 과정과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로비
▲기자간담회 현장, 작품을 감상중인 사람들의 모습 ⓒ김연신 기자

미완결의 공간과 ‘틈’

필립 파레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이 둘이 결합되는 영역을 탐구한다. 그는 예술 작품과 전시를 대하는 방식을 실험하면서 시간과 기억, 인식과 경험,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고민하고, 개별 작품을 집결해 선보이는 자리가 아닌 통합적인 경험의 장으로서의 전시를 제안한다. 

“미술관은 항상 닫혀 있는 공간, 말하자면 외부 세계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버블'과 같이 값비싼 작품을 외부 세계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채광이나 온습도를 조절하곤 한다. 나는 여기에 ‘틈’을 내고 싶었다.”

- 기자간담회 중 필립 파레노의 말-

전시장 곳곳에는 작가가 만든 ‘틈’이 가득하다. 이 틈은 보이지 않다가도 때로는 무시할 수 없는 소리의 형태로, 온도로, 양감으로, 움직임으로, 시간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파레노가 곳곳에 설치해둔 이 ‘틈’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전시의 묘미다.

작가는 사진, 그래픽 포스터, 조각,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사건의 순서와 연동되는 거대한 무대 환경에서 고정관념을 깨고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필립 파레노의 전시공간은 죽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이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의 모습에 가깝다. 5개월의 기간 동안 전시는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반응을 수집하고 변화를 축적해나갈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파레노의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으로, 지난 90년대 초기작부터 이번 전시에서 처음 소개하는 대형 신작까지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 6개 공간에서 대형 신작인 <막(膜)>(2024) 과 함께 <차양> 연작(2014-2023), <내 방은 또 다른 어항>(2022), <마릴린>(2012), <세상 밖 어디든>(2000) 포함 조각, 설치, 영상 등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가 ‘블루 룸’이라고 칭하는 M1 !층 전시공간 전경
▲작가가 ‘블루 룸’이라고 칭하는 M1 1층 전시공간 전경. 화면에 보이는 ai캐릭터는 배두나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사진=리움미술관)

작가는 전시를 할 때면 전시가 이뤄지는 공간의 건축적인 부분을 읽어내는 데 시간을 많이 쏟곤 한다. 리움미술관은 특히 각기 다른 공간들이 하나로 엮여 있는 특별한 형태로 이루어져있기에, 그러한 건축의 기능을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리움의 건축물을 공감각적으로 접근해 ‘색상’으로 감각했다. 이를테면 장 누벨이 설계한 M1 지하에는 오렌지색 필터를 붙였고, 위층의 공간은 '블루 룸'으로 조성했으며, 블랙 박스는 검은 색으로만 공간을 채우는 식이다.

전시 공간은 ‘미완결된 공간’으로서의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인상은 “평소 떠돌아다니며 방황하기를 즐기고,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완결됐다고 느끼지 못한다”던 파레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식사라는 행위를 통해 완결되는 ‘요리’ 말고는 모든 것이 완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느낀다. 미술 또한 그렇다고 보고, 그런 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업을 할 때 항상 그 작업을 자주 바꾸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연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업 하나하나가 내 몸의 연장인 것처럼 느껴지기에, 그 변화 사이에서 연결된 감각을 느낀다. 또한, 나는 공상의 순간이 일종의 마법적인 순간이라고 여긴다. 이를테면, 책을 읽다가 다른 생각에 무엇을 읽고 있는지 한참 동안 망각하다가 다시 돌아가는 순간들, 혹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가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공상하는 시간들이 있다. 나는 이런 시간들이 다른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 쏟는 시간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 생성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주 소중한 시간이라고 여겨진다.”

- 기자 간담회 중 필립 파레노의 말 -

파레노의 전시는 목적을 향한 몰입보다는 오히려 ‘잠깐 드는 잡생각’과 같은 방해에 가깝게 느껴진다. 파레노가 곳곳에 설치해둔 장치들은 산만하게 개입하며 몰입에 틈을 만든다. 전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멈춰 있는 듯한 ‘잠깐 정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머물러 있을 틈새 없이 계속 변화하며 말을 걸어온다. 여기서 우리는 파레노가 말하는 ‘틈’을 발견할 수 있다.

▲막(膜), 2024 (사진=리움미술관)
▲막(膜), 2024 (사진=리움미술관)

공명하는 ‘다수의 목소리’

전시 제목 《보이스(VOICES)》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목소리’다. ‘다수의 목소리’는 작가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요소이자 작품과 전시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들은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발화하는 주체로 변신한다. ‘다수의 목소리’는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탄생한 다층적 의미가 담긴 다수의 작품으로, 전시는 이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의 공간으로 집결시키며 주체적 대상으로 재탄생시킨다. 

이를 위해 작가는 배우 배두나와 협업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창조했다. 배두나의 목소리는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된다. 이 새로운 목소리는 새로운 언어인 ‘∂A’를 배우며 성장한다. 

미술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신작 <막(膜)>은 타워처럼 보이지만 색다른 인지력을 가진 인공두뇌다. 새롭게 탄생한 목소리인 <∂A>(2024)와 상호작용하며 전시의 모든 요소를 조율한다. 센서 기능이 탑재돼 있어,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까지 지상의 모든 환경 요소를 수집하고 미술관 내부로 보낸다. 유입된 데이터는 사운드로 변환되기도 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자극하기도 하며 전시를 활성화시킨다. 이때, 소리는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 운율을 활용한 새로운 VSO(동사-주어-목적어) 언어인 ∂A의 신호를 해석하여 ‘단어’와 ‘문구’로 표현하는 동안에 탑의 양태를 기반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탑은 ‘캐릭터가 살아가는 장소’로서도 기능한다. 탑 안의 캐릭터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이끌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말하는 것보다 듣고 사색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데이터에서 특정한 인지 패턴이 인식될 때, 차분하고 사색적이며 음악적인 분위기의 멜랑콜리한 상태를 취한다. 작가는 캐릭터가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다고 여긴다고 말한 바 있다.

미술관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두 영상이 있다.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제작된 <대낮의 올빼미>(2020-2023)로 거의 정지된 듯한 물가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는 야외 데크에 설치된 타워/인공두뇌가 포착하는 모든 환경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정지된 것 같아 보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상을 소개한다. 창밖을 향하고 있는 <일광반사경>(2023)은 햇빛을 반사하고 로비의 벽을 타고 커다란 광원을 그리며 외부와 내부를 연결한다. 

▲M1 1층에서 보는 M1 B1 전시 전경
▲M1 1층에서 보는 M1 B1 전시 전경. 창 밖으로 석양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만 같다. ⓒ김연신 기자

석양빛으로 정지된 디스토피아

M2 B1에 들어서면 사방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입구 쪽 천장에 달려있는 스피커는 그리드 형태로 장착된 15개의 초지향성 스피커로 구성돼, 축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회전하며 움직인다. 스피커는 단순히 공간에 소리를 송출하는 역할을 넘어서 전시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수신함과 동시에,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른 소리를 다시 송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 쪽에서는 자동피아노(Disklavier)가 연주되고 있다. 피아노 위에 주황빛 인공 눈이 쏟아지는 모습은 멜랑콜리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유도한다. 전시를 거대한 악기라 가정한 파레노는 전시를 ‘연주’하며 악기로서의 본성을 수용하고, 악기에 장착된 시퀀싱 프로그램을 통해 박자와 선율을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피아노에 장착된 소리와 빛의 고유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주변 작품과의 안무는 전체를 환기해주는 역할을 한다. 

창에 붙인 시트지로 채광을 의도적으로 조절한 전시장에는 음울한 석양빛이 감돈다. 이 역시 설치작품 중 하나다. 설치작품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2002)은 19세기 말 SF소설인 가브리엘 드 타드(Gabriel De Tarde)의 <지저 인간 Underground Man>(1896)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품은 태양이 사라지고 멸망한 세상에 남겨진 생존자들이 인간이 창조한 예술과 지식의 결과물을 챙겨 땅 밑으로 들어가 새로운 유토피아를 구축하고자 한 소설의 서사를 참조한다. 소설 속 태양이 사라지고 멸망한 지구의 풍경을 재현하고자 창에 오렌지색 시트를 붙여, 해질 무렵 석양 빛으로 영원히 물든 상태를 시각화했다. 이 작업으로 전시장은 대낮에도 시간이 정지된 듯 지는 해의 붉은 빛을 머금고 있다. 작품은 공간 전체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상상과 현실이 중첩된 몽환적인 분위기로 전환시키고 있다.

또한 전시장 도처에는 앞길을 막거나 발에 채이곤 하는 풍선 물고기가 부유하고 있다. 〈내 방은 또 다른 어항〉(2022)은 부유하는 물고기와 함께 전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어항으로 만든다. 시간과 중력이 정지된 것처럼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공중에 머물러 있는 물고기들은 전시 공간의 탈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어항을 뜻하는 ‘Fish Bowl’은 ‘관찰의 대상’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 곳에서 부유하는 물고기들은 전시장 안에 들어선 관람객들의 관점을 전복시킨다. 전시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닌 관조 대상이 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빛 햇볕과 눈사람들. (사진=리움미술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빛 햇볕과 눈사람들 ⓒ김연신 기자

시간을 뒤틀어, 겨울

M2 B1에서는 다수의 눈사람과 마주칠 수 있다.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1995-2023)는 실제 눈으로 만든 눈사람들로, 1995년 일본 도쿄 기린 공원(Kirin Park)에서 처음 소개됐다. 공원에서는 회사원들이 점심시간마다 모여 식사를 하곤 했는데, 파레노는 이 공원에 눈사람 모양의 얼음 조각을 설치해 점심 동안 눈앞에서 녹아내리는 조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시간의 흐름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파레노는 최근 <눈사람> 작업에 흙을 섞어 흔히 동심과 연관 지어 떠올리는 눈사람의 이미지에 디스토피아적 현실성을 부여한다. 본래 미술관은 온습을 유지하며 작품을 보호하는 공간이지만, 눈사람은 예외다. 전시장 곳곳에서 일그러지며 녹아내리는 작은 눈사람들은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틀고 전시 공간의 연약성을 드러낸다. 눈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녹게 되면 새로운 눈사람으로 대체된다. 이 눈사람들을 위해 미술관은 제빙기까지 구비해뒀다. 

이렇게 마주칠 수 있는 기묘한 사물은 눈사람뿐만이 아니다. 서서히 녹는 얼음 조각, 문 손잡이가 된 크리스마트 오너먼트, 초현실적인 풍경에 군집한 펭귄 사진, 전시장 창문 바깥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 한구석에 거대한 높이와 면적으로 쌓인 잿빛 눈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벌어진 이벤트 그 이후의 시간, 또는 앞으로 벌어질 이벤트 직전의 시간을 다양한 매체로 탐구해온 파레노는, 겨울이라는 특정 계절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들을 전시장 구석구석에 배치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중정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다. 작품 제목인 ‘혼란의 시기: 일 년 중 십일 개월은 예술 작품이고 12월은 크리스마스’는 이 평범한 나무가 시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도록 유도하는 보편적인 장식이자 특정 시간을 내포하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전시장 한 켠의 거대한 눈더미는 특정 객체에 대해 친숙하다고 생각한 우리의 관점을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장면을 통해 무너뜨린다. 현실처럼 보이게 하는 작가의 의도는 결국 우연히 작용하는 수많은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의 산물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뒤덮인 눈 등 시간을 비틀어 겨울을 인식하게 만드는 사물들.  (사진=리움미술관)
▲크리스마스 트리, 뒤덮인 눈 등 시간을 비틀어 겨울을 인식하게 만드는 사물들 (사진=리움미술관)

지나간 이미지의 재현

M2 1층은 여러 협업자들과 제작한 1990년대 - 2000년대 초기작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프랑스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Paris), 네덜란드 패션사진 듀오 이네즈 앤 비누드,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 등과 제작했던 10여 점의 작품을 여기서 만나볼 수 있다. 

작가의 유년기를 배경으로 한 희망과 디스토피아에 대한 사진과 영상 〈엔딩 크레딧〉(1999)과 이름도 역할도 없는 일본 망가 캐릭터 ‘안리’에 목소리를 부여해준 영상 작품 〈세상 밖 어디든〉(2000)은 대상이 여러 형태의 목소리로 가시화 되어 존립의 (불)가능성과 예술의 저작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파고든다. 나아가, 조명 및 가구 설치 작품 〈루미나리에(피에르 위그, 필립 파레노, M/M)〉(2001)과 그래픽 포스터 〈안리: 유령이 아닌, 그저 껍데기(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2000)는 피에르 위그, M/M(Paris)와 다양한 매체의 협업 방식을 소개한다.

블랙박스는 영화관으로 기능한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를 환생시킨 영상 〈마릴린〉(2012)은 기계 장치를 통해 시선과 음성, 필체를 구현하여 유령처럼 허구의 눈속임으로 관객을 이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조종되는 것과 조종하는 것, 실존하는 것과 허상 간에 유사 인간의 시선과 장소에 대한 기억 속 재현은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주제다. 

영화 산업이 절정에 이르렀던 1950년대를 풍미한 배우 마릴린 먼로는 한 때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에서 머물렀다. 영상은 그 장소를 배경으로 하며, 대중 문화의 주요 아이콘으로 남은 배우의 영혼을 소환하는 의식처럼 전개된다.
 
영상은 세 가지 장치를 이용해 마릴린 먼로의 존재를 재현한다. 첫 번째로 카메라가 마릴린 먼로의 신체가 되어 그의 시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그의 시점과 일치시킨다. 두 번째로, 컴퓨터 프로그램이 그의 음성과 고유의 운율을 재구성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필체를 학습한 로봇 한 대가 그의 손놀림을 재생해 화면 속 종이에 만년필로 글씨를 써 내려간다. 이로써, 영상은 화면에서 활용된 세 가지 장치를 통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 위에 전설적인 배우의 존재를 다시 불러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유령과 같은 존재로는 철거된 고야의 집을 보여주는 〈귀머거리의 집〉(2021)이 있다. 생명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C.H.Z.(지속적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2011)은 인공정원을 조성해 과학과 픽션의 경계가 불분명한 검은 풍경을 구현, 작가가 상상한 메타 세계와 현실에 주목한다. <최초의 차양>(2016-2024)은 영화 상영이 끝나면 공간을 환하게 밝히며 막간을 알리는 사이니지 조명 역할을 한다.

▲차양 연작, 2016-2023 (사진=리움미술관)
▲차양 연작, 2016-2023 (사진=리움미술관)

점멸하는 움직임

그라운드갤러리는 키네틱 공간으로 변신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깜박이고 움직이며, 관람객은 ‘섬광’을 인식하며 ’찰나’를 경험한다. <차양> 연작(2014-2023)은 기능이 부재하는 극장 차양의 모습을 닮아 있다. <차양>은 극장 입구의 화려한 불빛 차양에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황금기를 누린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특히 유행한 차양은 극장 안에서 상영되고 있던 영화의 제목과 출연 배우들의 이름을 알리는 광고판 역할도 했다.
 
파레노는 극장 간판의 원래 모습에서 영화 관련 주요 정보를 제거하고, 할로겐의 빛과 차양의 껍데기만 남겨두었다. 영화 대신 불빛 너머의 공간과 시간에 주목하게 만드는 이 연작은 현실을 공감각적으로 직시하게 하는 한편, 아직 오지 않은 현실 너머의 시공간을 암시하는 듯한 빛의 신호를 퍼뜨린다. 

전시장에 소개되는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연작 <차양>은 미술관 데크에서 온도, 습도, 풍량 등의 변화하는 기후 데이터를 수집하는 신작 <막(膜)>과 연결돼 야외의 환경 조건에 따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면서 실내와 바깥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벽을 따라 〈깜빡이는 불빛 56개〉(2013)의 공연이 펼쳐진다. 공간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움직이는 〈움직이는 벽〉(2024)은 마치 건물의 벽면이 떨어져 나와 움직이는 듯하다. 

▲전시장 곳곳에서 부유중인 물고기를 찍는 사람들의 모습ⓒ김연신 기자

전시장에는 라이브 퍼포먼스 작품이 추가된다. 필립 파레노는 동료 작가 티노 세갈(Tino Sehgal)에게 관람객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의뢰한다. 관람객은 5개월의 전시 기간 동안 블랙박스와 그라운드 갤러리를 연결하는 두 대의 에스컬레이터에서 티노 세갈의 신작 <이렇게 장식하기(쉬헤라자드 파레노)(보이스 버전)>(2024)과 언제든지 교감할 수 있다.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마련했다.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를 직접 들어볼 수 있으며, 큐레이터 토크에서는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이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니콜라 부리오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의 강연에서는 90년대 활발한 활동을 보인 작가들을 살피며 필립 파레노를 조망해 본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심도 있게 다루는 작가 연구 세미나가 월 1회씩 열린다.

더불어 M2 2층에서는 작품 <현실 더 이상 안돼(후반부)>(1993/2009)와 <말하는 돌>(2018)을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선보인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자 인형극을 만들며 작품 감상 뿐만이 아닌 창작에도 직접 참여해볼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대상 <그림자 인형극 워크숍>이,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누구나 참여 가능한 자율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프로그램 참여 신청은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한편, 이번 전시는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의 문화예술 후원 프로그램인 ‘메르세데스-벤츠 셀렉션’의 지원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