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미술현장크리틱]정현의 조각: 가상의 데이터 덩어리 
[이은주의 미술현장크리틱]정현의 조각: 가상의 데이터 덩어리 
  •  이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24.03.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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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br>
▲이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까? 중견을 훨씬 넘어 점차 원로작가의 대열에 들법한 작가가 새로운 신작을 내놨다. “지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했다”는 고백과 함께. 정현의 《덩어리(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2023.12.20.~2024.3.17.)》전 이야기다.

그래서였을까. 본적 없는 새로운 작업이 나왔다. 폐자재 나무, 버려지고 하찮은 것들을 작업으로 소환시켰던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뽀얗고 새하얀 조각을 만들었다. 거대한 크기의 조각이다. 정현은 그간 산과 흙속에 파묻혀 오랜시간을 견딘 돌들을 찾았다. 외형상은 큰 변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업의 출발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 역시 시간의 두께가 켜켜히 쌓인 돌에서 출발한다. 문명이 닿을 틈 없이 거대한 자연이 만든 돌이다. 육중한 돌로 만들어졌을 법한 작업들은 실제 무늬만 돌이다. 여수 바닷가에서 주운 400여개의 돌 모양 그 자체를 뽐낸 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지각색의 돌 색깔마저도. 이게 바로 정현의 새로운 시도였다. 정현은 바닷가에서 주운 돌을 한 주먹으로 크게 움켜쥐어 만지고 본 무늬들을 컴퓨터로 옮겼다. 자연에 둘러 싸여 하루하루 버리기 연습을 하면서 손에 딸려온 것은 바닷가의 돌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현은 바닷가에서 주운 돌 400여개를 일일이 3D스캔을 떳다. 그리고 그는 유독 유심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만졌던 부위를 데이터로 채취했다. 가상의 영역에서 부분적으로 절단된 돌들은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 만날 수 있다.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하니 현실에 없을 법한 돌조각이 생성된다. 공룡의 알 같기도 하고, 긴 시간 동굴에서 서식한 기둥 같기도 하다. 가상의 영역이 현실보다 더 실재처럼 확장된 2010년 중반 ‘포스트 인터넷’ 논의가 나왔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터넷 영역에 또 다른 지평이 세워진 셈이다. 바로 가상현실에 대한 재인식이었다.

전시장 좌대엔 여수에서 채취한 돌을 함께 전시했다. 작가 정현. 
▲전시장 좌대엔 여수에서 채취한 돌을 함께 전시했다. 작가 정현. 

깨진 픽셀, 저화질, 클로즈업 등 육안으로 인식할 수 없는 가상의 시각이 ‘포스트’라는 용어를 달고 어느새 현실로 튀어나왔다. 가상현실 개념을 물리적 공간으로 재편시키는 논의였다. 쉬운 예로 증강현실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가상과 현실의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감각을 취할지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가상으로 몰입해야만 감각할 수 있었던 이미지를 이젠 물리적 공간에서 체험할 수 있다.

정현의 이번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현실세계 돌은 컴퓨터 속에서 숫자로 재현되고, 가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조각 형태가 구축된다. 가상의 데이터는 손을 떠나 기계로 완성된다.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공간에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조각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철저히 미디어적이다. 가상의 데이터로 탄생해서 일까. 육중할 것 같은 돌 조각은 가볍다. 바닷가 돌에서 모양뿐 아니라 무늬도 그대로 따왔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은 실제 돌(조각)같지만 돌은 아니다. 그리고 이 돌 모양은 현실세계엔 없다. 모두 가상의 영역에서 빚어냈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전경

정현은 지난세월 축척한 것에서 빗겨서기로 했다. 새로운 실험이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덩어리’를 만들면서 물질성의 정 반대 개념인 비물질 세계에서 이미지를 획득했다. 노동집약의 산물인 육중한 돌 작업을 기계장치로 대치시켰다. 디지털 세계에서 완성된 드로잉, 기계장치로 완성된 돌 조각은 금방 조각의 경계를 의심케 한다. 굉장히 새롭다. 자유분방한 색색의 돌은 모두 하얗게 변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