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네팔 셀파족 영험하다는 두 남, 여무당과의 만남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네팔 셀파족 영험하다는 두 남, 여무당과의 만남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4.03.0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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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내가 네팔에 도착했던 1998년 7월은 마침 우기여서 지인을 통해, 개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처럼 여행객이 묵어가는 소박한 시골집 같은 집을 소개받게 되었다. 무궁화꽃이 앞뒤마당으로 한가득 피어있는 모습을 보며 무궁화나무의 고향이 이곳 카트만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네팔에 도착한 지 사흘만에야 셀파족 중 가장 영험하다는 남자무당, 한국에서는 박수라고 하는 아주 귀한 무당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오전 9,10시경으로 기억이 된다. 나를 안내하는 타망족 학자와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원광대 독문학과 윤시향교수와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그 유명하다는 박수집을 향했다. 무슨 질문을 어떻게 해야 그의 실체를 제대로 만날 수 있을까 호기심으로 흥분된 마음을 안고.

의외로 그의 집은 자연계단으로 된 2층높이가 될 듯한 가파른데 너무나 정갈하게 쓸고 닦아 빛이 날 정도로 알뜰하였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걸려있는 냄비들은 분명 주방도구인데 마치 장식품 마냥 걸려있었다. 주인의 성품과 삶의 모습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방을 열고 들어가니 아주 차분하고 품격이 풍기는 학자 같은 72세 초로의 노인이 우리를 맞이한다. 한국에서 우리나라 새남굿 최초의 보유자 김유감 무당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머리를 스치며 언제 박수가 되었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김유감 무당이 7살 때 무엇에 홀린 듯 어느 산에 가서 땅에 묻혀있던 무당방울쇠를 들고 와서부터 신이 내려 무당이 되었다는 얘기가 뇌리를 스쳐갔다. 이 네팔의 박수 양반이 거의 비슷한 나이에 우연히 접신을 하게 되었고 그 뒤부터 내내 사람들의 마음의 문제를 풀어주며 살아온다는 것이다.

이분이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지가 나의 관심사였다. 나는 여행 중 싱가포르 공항에서부터 얼굴과 몸에 피부가 덧난 듯 아픈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왜 그런지 혹 알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어 봤다. 그랬더니 나의 오른손을 보자고 하더니 나의 손바닥과 손가락의 마디를 세어가며 나의 운세를 보았다.

그러면서 이르는 말이 나의 항성에 귀찮은 별이 스쳐가며 속을 썩이며 나의 운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쳐가는 별은 나의 항성을 스쳐가며 괴롭힐 뿐, 대적할만한 가치가 있는 별이 못되니 2,3개월 후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데리고 일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니 배신할 것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손금을 보는 게 아니고 손바닥의 마디를 세며 운을 읽어내는 방법이 서양의 별점 보는 방법과 많이 닮아 있으면서도 또 반은 전혀 다름을 인지했다.

그런데 상황은 너무나 잘 읽어내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내가 운영하는 사단법인 한국공연예술원을 도와 내게 일을 배우며 함께 하겠다고 졸라 스스로 와서 일을 하던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 이 아무개가 떠올랐다. 내가 계획하던 <어린이 문화예술학교>를 맡아 해보겠다고 해서 지인을 소개하여 해보라고 했는데 그 기구를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나갔다.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나를 고소한다고 엄포를 놓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예정된 여행이라 길을 떠나오면서도 많이 불쾌하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 대충의 얘기를 듣더니 지나가는 별이니 너무 마음쓰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마음을 다스렸다.

다음날 아주 영험하고 힘이 있다는 <엄마 무당>이라는 무당을 새벽 6시에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서둘러 그의 집에 도착했다.  늦으면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벽 6시가 좀 못 되어 도착했는데도 손님들은 제법 많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고 뭐고 할틈 없이 6시가 되자 무당은 의사가 환자를 맞이하듯 차례대로 보아주었다. 병이 가볍거나 문제가 간단한 사람은 그의 앞에 앉기가 무섭게 목소리의 톤이 가볍고 명랑하지만 병세가 깊은 사람 앞에서는 무겁고 어둡게 변했다.

너무 놀라웠던 일은 함께 갔던 윤시향 교수를 대하더니 조상신이 괴롭혀 몸이 무거워 수술을 할지 모르겠다며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어둡고 무거워졌다. 결국 윤교수는 돌아와서 큰 수술을 하고 다행히 잘 회복돼 지금까지 건강하다.

윤 교수 다음으로 내가 무당 앞에 앉으니 목소리가 꾀꼬리 같이 맑이지더니 ‘잠깐 구름같이 근심이 사라지면 만사 OK’라고 했다. 고마워서 복채를 놓으려 하니 내일 아침 이 시간에 오라고 한다. 미국에서 12명의 석, 박사과정의 제자들이 와서 <호랑이 만신> 체험 수업을 하니 함께 하면 좋을 거라 하여 다음날 아주 희한한 체험을 한다.

그 결과 미국에서 제자를 동원하고 왔던 샌프란시스코의 심리학 교수는 다음 해 내가 유네스코 한국본부와 함께 예술의전당 뒷산 언덕에서 개최한 제3차 샤마니카페스티벌 <히말라야권 무속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많은 한국 무속과 불교행사를 공부하고 돌아갔다.

글이 길어지지만 꼭 언급을 하고 끝내야 하는 이 글의 마무리는 네팔의 무당들이 손님을 대할 때 마치 환자를 대하듯 엄숙하게 대하는 모습이다. 돈에 허망을 하거나 찌들지 않고 보리 한 줌, 바나나 2개, 또는 삶은 감자 한 바가지 등 손님들이 가져오는 대로 ‘권위를 잃지 않은 채’ 받고 보내며, 자신이 고칠 수 없는 병은 병원으로 보내는 모습을 보고 한국의 무당들과 많이 비교되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까지도 그들의 정직하고 소박한 모습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끔 꺼내보는 기분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다음 호에는 중국 안휘성 귀지에 가서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다 사라질뻔한 탈춤 복원 과정과 정월 고사 지내는 풍습을 써보려 한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어렸을 적 즐기며 행복해 했던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도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