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바흐는 음악가의 아버지(?)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바흐는 음악가의 아버지(?)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3.0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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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바흐는 2번 결혼하여 20명의 자녀를 둔 성실한 가장이었다. 1707년 결혼한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와 5남 2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1714~1788)은 어린 시절 자기 집이 ‘비둘기집처럼’ 생기가 넘쳤다고 회상했다. 바흐가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면 아이들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을 때뿐이었다. 그가 바란 것은 아이들이 노래를 좀 더 잘 부르고, 작곡을 좀 더 잘하고, 또 악기를 좀 더 잘 다루게 하는 것 뿐이었다. 1720년 바르바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바흐는 궁정의 젊은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음악을 잘 이해했고, 생모를 잃은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녀는 예쁜 패랭이꽃을 손질해서 새 가정을 아늑하게 단장했다. 안나는 남편의 악보를 사보하여 도움을 주었는데, 남편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필체가 비슷해서 후세의 바흐 연구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2권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했다. 이 소곡집에는 바흐가 아내를 위해 직접 쓴 가곡도 하나 들어 있는데, 행복한 죽음을 꿈꾸는 내용이다.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난 죽음의 안식을 찾을 때까지 기쁘게 살 것이네. 오, 그대의 아름다운 두 손이 내 충실한 눈을 감겨 준다면 나의 마지막은 얼마나 즐거울까!”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란 칭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음악가의 아버지’임을 자랑스레 여겼다. 그는 두 차례의 결혼에서 2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과 막내 요한 크리스찬은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남겼다. 바흐와 모차르트의 시대, 그 사이를 이어준 징검다리는 바흐의 아들들이었다. ‘북독일의 바흐’로 불린 둘째 아들 엠마누엘 바흐(1714~1788)는 생전에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렸다. 그는 아버지 바흐의 '학구적 양식'(learned style)과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인 ‘갈랑 양식’(gallant style)을 구분하고, “아버지의 양식이 교회 음악에 적합한 반면, 극장 음악이나 실내 음악에는 나의 ‘갈랑 양식’이 제격”이라고 했다. 아버지 바흐는 당시 계몽주의와 이에 따른 음악 양식의 변혁기에서 구세대에 속했다. 이 사실을 자각한 바흐는 신세대와 대립하기보다는 과거 예술의 집대성에 힘을 쓰게 된다. 만년의 걸작 <골트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어 2집>, <푸가의 기법>은 과거 건반음악의 집대성이었고, <미사 B단조>는 그의 종교음악을 총결산한 것이었다.

반면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는 “진정한 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낭만적 예술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올바른 건반악기 연주 기법>(1753)에서 “연주자가 스스로 감동받지 않으면 타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강조하고, “연주자는 기술만 갖춘 ‘조련된 새’에 그쳐서는 곤란하며, 영혼으로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하이든, 모차르트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 하이든도 엠마누엘 바흐의 피아노곡을 공부했다.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엠마누엘 바흐에게 많은 신세를 졌고, 그를 잘 이해하려고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엠마누엘 바흐는 28년 동안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일하며 많은 작품을 썼는데, <프러시아 소나타>와 <뷔르템부르크 소나타>가 특히 유명하다. 그는 뚜렷한 제시부와 전개부를 지닌 소나타 형식을 개발했고,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구성된 고전 소나타의 원형을 만들었다. 

바흐의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5~1782)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762년부터 영국에서 활약하여 ‘런던의 바흐’로 불렸으며, 새로 개발된 포르테피아노를 대중 앞에서 연주한 최초의 음악가로 꼽힌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유려한 선율과 화음을 익힌 그는, 런던을 방문한 8살 모차르트의 음악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아버지 바흐가 직접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간과하면 곤란하다. 모차르트는 빈 도서관장 반 슈비텐 남작에게서 바흐의 악보를 빌려서 공부했고, 그의 푸가를 현악사중주로 편곡해서 연주하곤 했다. 베토벤의 어린 시절 스승인 네페는 베토벤에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습하도록 했다. 베토벤의 책상 위에는 만년까지도 늘 바흐의 악보가 있었다. 쇼팽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직접 연습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이 곡을 교재로 사용했다.

‘음악의 아버지’란 표현은 위대한 바흐에 대한 적절한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나 바흐 이전에 음악이 아예 없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아버지 이전에 할아버지가 계셨던 게 당연하듯, 바흐 이전에도 수많은 음악가가 있었다. 심지어 기욤 뒤파이(1397~1474)나 조스켕 데 프레(1440~1521) 같은 옛 음악가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 바 있으니, 이 칭호는 수사적인 표현일 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좋겠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결과 남자인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어색하다. 가발 쓴 헨델의 초상을 보고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바흐, 헨델과 동갑내기 작곡가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67)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실도 아쉽다. 스카를라티는 로마에서 헨델과 만나서 연주 실력을 겨뤘는데 오르간은 헨델이 압도적으로 뛰어났지만 클라비어는 오히려 그가 헨델보다 낫다는 평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 후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을 평생 간직했다. 스카를라티는 포르투갈 공주 막달레나 바르바라의 음악 선생으로, 그녀가 스페인 여왕이 되자 세비야에 머물면서 555곡의 빼어난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소나타는 바흐의 건반음악에 비해 훨씬 ‘모던’하게 들린다. 바흐와 헨델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거장 텔레만(1681~1767)의 음악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든 것도 안타깝다. 텔레만은 진보적인 음악가로 생전에는 바흐의 명성을 능가했으며 <타펠무지크>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바흐는 그를 존경하여 둘째 아들 엠마누엘의 대부로 모시기도 했다. 최근 텔레만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