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숯검뎅이 분장 속 피어난 발레강국의 저력
[성기숙의 문화읽기] 숯검뎅이 분장 속 피어난 발레강국의 저력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24.03.0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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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60년의 예술적 여정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국립발레단의 초기 30년 역사는 임성남(1929~2002)과 등식화된다. 전주 출신 임성남은 해방 직후 한동인이 창단한 서울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스승 한동인이 납북되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에서 시마다 핫도리를 사사하고 니혼고등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유학시절 접한 체계적인 음악공부는 고전발레의 재현과 창작발레 작업에 귀중한 자양분이 됐다.

일본 유학파인 선배 한동인, 정지수가 북행하자 한국 발레계의 빈 자리는 그의 몫이었다. 1962년 창단된 국립무용단은 발레를 포함한 다장르가 공존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국립무용단에서 분화한 국립발레단은 1973년 국립극장 남산시대 개막과 함께 발레 전문단체로 새롭게 발돋움했다. 약 1,400여석에 달하는 대극장 규모인 남산 국립극장은 극적 서사 중심의 발레에 최적화된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무엇보다 국립극장 산하 국립발레단 창단은 직업 창출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본격 프로페셔널리즘 구현의 장이 됐다는 점에서 의미롭다. 

1960~80년대 국립발레단의 활동은 당대 한국의 발레 역사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임성남이 있음은 불문가지다. 그는 전통을 소재로 한 민족발레를 표방하여 한국발레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을 남겼다. ‘처용’, ‘배비장’, ‘춘향의 사랑’, ‘왕자호동’, ‘고려애가’ 등 소위 한국적 전통에 토대한 작품창작으로 국립발레단의 존재감을 높였다. 

그런 가운데, 두 차례의 국제행사는 한국발레의 도약을 견인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우선 86아시안게임 문화축전에 선보인 ‘춘향의 사랑’은 한국 고전소설 『춘향전』을 소재로 국제무대 진출을 모색한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주인공 더블캐스팅 제도를 최초 도입한 것도 기억할 점이라 하겠다. 춘향역(김순정, 전미연), 이도령역(김긍수, 문병남)을 맡은 신예 무용수들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주목을 끌었다. 더블캐스팅 발탁은 각 배역에 따른 경쟁구도를 조성하여 프로단체로의 지향성을 보다 뚜렷히 하는데 일조했다.   

88서울올림픽 문화축전에 선보인 ‘왕자호동’은 국립발레단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고구려의 대륙적 기상을 통한 한민족의 정신을 표현한 ‘왕자호동’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춘향의 사랑’에서 이도령역을 맡은 김긍수와 ‘왕자호동’에서 낙랑공주로 열연한 최태지는 훗날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에 발탁되는 등 남다른 행운을 누렸다.       

1993년 국립발레단은 큰 변곡점을 맞는다. 30여년간 국립발레단을 이끌던 임성남이 퇴장하고 한국 최초의 영국 유학파 출신 김혜식이 새 단장으로 선임된다. 실력에 따른 캐스팅은 서열위주의 억압적 구조를 무화시켰다. 김혜식은 발레안무 보다는 CEO 역할에 집중하여 후원회 결성, 문화학교 개설, 단원들의 국제콩쿠르 참가 등 기획 역량을 발휘하여 관심을 집중시켰다. 자율성을 부여하는 대신 체질 개선을 통한 대외경쟁력을 추구한 파격적 운영은 눈여겨 볼 점이다. 

파격은 계속된다. 제일교포 2세 출신 최태지는 최연소 단장 발탁이라는 점에서 화젯거리였다. 실력파 무용수 중심의 소위 스타시스템을 표방하여 성공을 거뒀다. 특히 ‘해설이 있는 발레’는 국립발레단의 공공성 강화에 무게를 둔 유의미한 기획으로 평가된다. 최태지는 남다른 열정과 의욕으로 작품 ‘바리공주’를 선보였으나 실패작으로 귀결됐음은 다소 아쉽다.  

2000년 국립단체의 재단법인화 전환에 따라 국립발레단은 남산을 떠나 우면산 자락 예술의전당에 둥지를 튼다. 4대 단장으로 부임한 김긍수는 노조가 결성되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단체를 이끌며 덕장의 리더십을 보였다. 특히 해외공연을 본격화하는 등 임성남을 잇는 남성발레무용가로서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했다. 작품 ‘결혼’(2003)을 안무하는 등 보기 드물게 창작발레를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박인자는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를 확충했으나 대부분 해외 명작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했다. 한편 사회 저명인사를 겨냥한 관객층의 저변확대는 긍정적인 성과로 손꼽힌다. 2008년 국립발레단 6대 예술감독으로 최태지가 화려하게 복귀했다. 발레의 명품화, 세계화를 표방한 공격적 리더십으로 나름 성공을 거뒀다. 

2014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 강수진이 제6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예고된 금의환양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 수준의 경험과 독보적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발레를 더 한층 발전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 낙점되었다. 기대가 컸다. 취임에 즈음하여 강 예술감독은 ‘안무는 해 본 적도 없고 계획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안무를 기피하는 그의 ‘남다른 뚝심’은 네 번째 연임에 성공하는 열쇠가 됐다. 창조성이 결핍된 한국발레의 현주소가 아닌가. 

문체부는 2024 파리올림픽을 맞아 ‘파리 코리아시즌’을 마련한다. 대한민국의 순수 공연예술을 통해 문화적 우수성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국립오페라단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그리고 국립합창단 등 세 단체가 협업으로 작곡가 이영조의 오페라 ‘처용’을 들고 유럽무대에 선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이처럼 오페라 ‘처용’은 유난히 올림픽과 연인이 깊다.                              

파리올림픽에 국립발레단은 갈라 무대를 준비한다. 발레의 본고장 파리에서 국립발레단이 보여주는 갈라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유럽 관객에게 어떤 감동과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창의적 기획이 아쉽다. 국립발레단 작품유산 속에서 파리올림픽 콘셉트에 걸맞는 한국적 소재의 작품을 선보이면 어떨까?

앞서 ‘처용’은 이영조의 오페라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국립발레단 초대 단장을 지낸 임성남의 발레 작품 ‘처용’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임성남은 ‘배비장’, ‘춘향의 사랑’, ‘왕자호동’, ‘고려애가’ 등 한국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소재를 발굴,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주지하듯, 한국발레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성장했다. 오늘날 한국이 아시아의 발레강국으로 발돋움하기까지엔 발레 1세대의 치열한 노력과 헌신이 있어 가능했다. 임성남 선생은 언젠가 숯검뎅이로 눈썹을 그리고 빨간색 면내복에 검은 물감을 들여서 타이즈 대용으로 착용하고 춤췄노라고 술회했다. 실로 눈물겨운 얘기다. 

6.25 전쟁 이후 궁핍했던 시절 척박한 토양에서 서양 귀족예술의 전형인 발레를 춤춰야했던 시절의 서글픈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신흥 발레강국으로 발돋움한 ‘오늘·여기’ 한국발레의 나아갈 방향은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