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김길후 작가 “동서양 융합하는 인류사적 작품 남기는 것이 꿈”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김길후 작가 “동서양 융합하는 인류사적 작품 남기는 것이 꿈”
  •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3.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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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명작을 그리기 위해 그리고, 또 그린다
“명작이란 자아가 빠진 작품, 자아 분리 위해 찰나의 시간과 노력 중첩된 작품으로 진검 승부”
70 세 까지 5만점 남길 것... 2m 사이즈, 3000점에 이르는 신작 제작 중
중국 길거리서 3년간 묵묵히 작업…4대천왕 거쳐간 갤러리서 대규모 개인전
“나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상 이후 부산서 김 작가 모시기 위해 구애...전시와 팬미팅 열려
13일부터 학고재갤러리, 백남준·윤석남·김길후 대규모 3인전 예정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천재는 다작(多作)을 한다.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예술가인 피카소는 75년의 생애 동안 회화 1만3500점, 그래픽 프린트와 판화 10만점, 책삽화 3만4000점, 조소와 도자기 300점 등 총 16만점을 남겼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50 년을 노력했다”고 말했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김길후 작가를 소개하면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을 언급한다. ‘뭔가에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뜻이다. 윤 평론가의 눈에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그림만 그리는 ‘다작의 작가, 김길후’는 그야말로 “그림에 미친 사람”과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작업 도중, 김길후 작가의 모습
▲김길후 작가가 작업도중 붓으로 자신의 이마에 장난스레 물감을 바르고 있다.

김길후 작가는 목욕탕을 가도, 버스를 타도, 자나깨나 그림을 그린다. 대학 시절엔 MT를 갈 때도 화구를 바리바리 싸가서 그림을 그렸다. 전시를 하게 되어도 주변에 잘 알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림만 그려왔다.

70세까지 5만 점을 남기는 것이 그의 목표다. 5미터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 작품을 3시간 반 만에 완성하고, 20일만에 미술관 3층을 작품으로 전부 채웠던 작가의 평소 작업량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묵묵히 그림을 그려온 시간은 두텁게 쌓여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고, 그의 뒤에는 늘 ‘다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렇게 무수한 작품이 나왔음에도 작가는 만족하지 않는다. 1999년에는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1만 6천여 점의 작품을 불태웠다. 피카소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열망에 휩싸여,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던 기존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고 ‘블랙 페이퍼’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김길후 작가에게 ‘블랙’은 우주의 색이자,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색이다. 그는 ‘블랙’을 통해 자아가 없는 상태를 표현한다. “인류가 멸망해도 지구에 남을 수 있는 명작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 명작이란 자아가 없는 그림이다. 작품과 자아를 분리하기 위해 작가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잊을 만큼 망설임 없는 재빠른 필치로 붓을 긋는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그 모습을 두고 “마치 검객과 같다”고 표현한다. 김 작가는 찰나의 시간과 노력이 중첩된 작품만으로 진검승부를 던진다. 

▲작품 앞에 선 김길후 작가
▲작품 앞에 선 김길후 작가

김 작가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말해왔음에도, 오늘날 세상은 김길후를 주목하고 있다. 지난 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의 의미를 ‘작가로서 삶에 한 획을 그었다’고 새겼다. 이에 앞서 그는 2021년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한 것으로 그 실력은 이미 인정받았다. 이어, 3월 13일부터는 학고재갤러리에서 백남준, 윤석남 작가와 함께 작품을 전시한다. 작가는 자신을 “우물만 끝없이 파다가 죽는 화가”라고 묘사했지만, 세상은 이미 김길후가 파둔 우물의 깊이에 감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현재 중국 베이징과 대구 두 곳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으며, 달성군에 작업실을 겸한 전시공간으로 ‘동제미술관’을 운영 중이다. 가창저수지 근처 한적한 양지마을 입구에 위치한 동제미술관은 꾸준히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작가는 오랜 시간 침묵해왔지만,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해왔다. 이번 ‘서울문화투데이 제 15회 문화대상’ 수상은, 그를 향한 세상의 꾸준한 관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림에 있어 우직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와 도전을 추구하는 작가 김길후, 서울문화투데이는 이번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하며 그를 만나 우물과 같이 웅숭깊으면서도 명징한 그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 15회 문화대상 수상자로 선정돼 지난 1월 수상했다. 이 상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작가가 작업을 할 때, ‘상’이란 건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작품 활동은 어떻게 보면 주관적인 것인데, ‘상’이라는 외부의 인정을 통해 객관적으로 인증이 된다고 느낀다.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있지만, 상은 극소수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발굴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불확실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지지해주던 사람들에게도 큰 기쁨이 됐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상은 나에게는 아주 보람되고, 작가로서의 삶에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상이 작가에게 중요하냐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상처와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 동안 나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여겨왔는데, 세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외롭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긍정과 희망을 느끼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미술부문 대상을 수상한 김길후 작가 (가운데)

수상 이후의 근황이 궁금하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전해줬다. 고향인 부산에서도  “부산 지역에 이렇게 훌륭한 작가가 있는지 몰랐다”며 주목하고, 대구에서는 “우리 김길후를 부산에 뺏기면 안되지”라는 식으로 관심을 가져줬다. 주변에서 관심을 받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줄 몰랐다. 국내에서 이렇게 기반을 다져가고, 인정받고 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라는 꿈을 한 단계씩 이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부산에서 팬미팅이 있었다. 부산에서는 문화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최근에 계속 있어왔는데, 그 과정에서 부산에 돌아와 작업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부탁을 받았다. 서울에서 둥지를 틀 계획이었기에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모임 자리가 인상 깊어서 생각이 바뀌었다. 부산에서 둥지를 트는 것도 고려를 해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왔다. (웃음)

80명 가량이 참석했던 모임 자리에서는 “왜 그 동안 김길후를 몰랐을까”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웃음) 학고재 회장님도 같은 얘기를 하셨다. 사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소식을 잘 알리는 타입은 아니다.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전시를 해도 홍보를 잘 안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미팅 때는 작품도 22점 가져가고, 그간 작업실 수장고에 묵혀두고 있던 도록을 한 부씩 돌렸다. 많은 관심을 표해주셔서, 인원을 늘려 2차 팬미팅 자리를 가지려고 계획 중이다.

오는 13일에 전시가 열린다. 학고재에서 약 3년만의 전시다. 윤석남 작가, 백남준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다고 들었다. 

마흔 점 가량을 전시한다. 두 분 다 훌륭한 작가분들이시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그동안 드로잉을 보여줄 기회가 잘 없었다. 관객이나 기획자 분들도 페인팅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페인팅이 낫겠지”라는 생각에 페인팅을 그려왔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드로잉을 보여드리려고 한다.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검정색의 작가’로 유명하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색인 만큼, 작품이 많은 감정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자기고백적이다. 

검정색은 잘못 쓰면 채도를 떨어뜨리고, 그림을 칙칙하게 만들기 때문에 작가들은 보통 검정색을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색이 검정색이라고 생각한다. 다루기가 어려워도, 잘 다뤄지면 고급스러운 표현이 가능하다. 모든 걸 떠나 ‘블랙’은 우주의 색이다. ‘근원’을 우주의 시작에서 찾지 않는가. 나는 검정색을 통해 ‘자아가 없는 상태’를 표현하고 싶다.

작가는 “예술 표현의 핵심은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를 지우는 데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작업 자체가 자신을 녹여내는 일이고, 감정이 들어가는 일이니 쉽지 않을 것만 같다.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작가들도 많지만, 나는 작품에 자아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자아가 개입하면 쉽게 싫증나는 법이다. 싫증나지 않는 명작들은 작가의 자아의 결핍에서 오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나 별, 나무나 지나가다 마주친 풀 한 포기 등 인간의 자아가 개입되지 않은 자연은 싫증나지 않고 늘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림에서 자아를 지운다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자아를 지우는 것은 인간애를 지우는 것과 같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애를 지우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속도’를 통해 그림에서 자아를 지운다. 갑자기 손을 베거나 하면 아픔이 시간이 조금 지나고 느껴지듯, 그림도 빠른 속도로 그리면 자아를 덜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오랫동안 작업하다 보면 빠르게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에서 자아가 덜어지곤 한다. 중국에서 육중한 작업을 할 때 완성이 안 돼서 눈물을 흘리며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다. 어젯밤에 잘 그렸던 작품이 다음날 다른 조명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고치고 또 고쳤다. 그렇게 오랫동안 작업하다 보면 빠르게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에서 자아가 덜어지곤 한다.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 처음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찰나와 영원은 결국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자면, 나는 처음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레몬을 그리고자 했는데 실패를 거듭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본 친구가 “너, 오늘 노란 코끼리를 잘 그렸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들여다보니 정말 노란 코끼리가 그려져 있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코끼리가 그려진 것이다.

▲The Wise Man, 2014, Mixed media on canvas, 230x160cm
▲The Wise Man, 2014, Mixed media on canvas, 230x160cm

다작을 하기로 유명하다. 

나는 아침에 눈 떠서부터, 잠에 들 때까지 붓과 연필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수영장이나 목욕탕에서도, 영화나 TV를 봐도 늘 그림을 그렸다. 버스를 타면 앞에 앉은 사람이나 바깥의 풍경을 그리곤 했다. 내 양손에는 늘 물감과 캔버스,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엠티를 가도 화구를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양이 질을 대변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게 공부시간이 길고, 방대한 양의 책을 가지고 있다. 나는 늘 양이 질을 대변한다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려 왔다. 그렇기에 그에 따르는 자존감이 아주 높았는데, 이는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다.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북경, 유럽으로 간 이유도 그래서다. 그 괴리를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어서 날 알아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 증명하고 싶었다. 북경에서 유럽으로, 내가 그린 그림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해맸다. 

오랜 기간 베이징에서 작업을 해왔다. 중국에서 작업하게 된 계기와 일화를 듣고 싶다.

나는 전시를 열게 된 도시에서 사는 버릇이 있다. 오래 전부터 ‘나를 초대하지 않는 도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전시에 초대받지 않은 도시나 나라는 방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을 떠났고, 일본이나 미국을 아직 가보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웃음) 중국 작업실을 운영한지는 15년가량 됐다. 중국은 그룹전에 초대 받아 처음 가게 됐는데, 개인전을 하면서 눌러 앉게 됐다. 처음 갈 때는 ‘니 하오’도 몰랐다. 북경에 중국어를 잘 하는 사람은 널렸기에, 나 하나 못한다고 문제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웃음) 

당시에는 전시 호응에 따른 자신감이 있었고, ‘5천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나라에서 내가 찾던, 나를 알아봐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품으며 자리잡게 됐다. 그러나 외지에서 혼자 작업하려니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길에 나가 3미터짜리 대형 캔버스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길에서 웃통을 벗고 작업을 하고 있으려니, 처음에는 사람들이 호기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이 나중에는 연민의 시선이 됐다. 

3년을 그렇게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와중 만나게 된 중국 작가가 “이러면 안 된다”라며 친구들을 소개시켜줬고, 현지 작가들과 교류도 하고 노력을 거듭한 끝에 2014년, 화이트박스아트센터에서 한국인 작가로는 최초로 대규모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화이트박스아트센터는 798예술구를 대표하는 갤러리이자 현대미술 4대천왕이 거쳐간 곳이다. 그 곳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매일 그림만 그리던 나를 연민의 시선으로 보던 중국 작가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렇게 나처럼 밤낮 없이 우직하게 그림만 그리는 작가가 없었다. 전시를 계기로 중국 작가들이 나를 우러러 보기 시작했고,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만 그리는 내 모습이 귀감이 되어 근처에서 작업을 하던 중국 작가들의 작업 방식에도 하나 둘 변화가 일어났다. 

더러는 내게 “지금까지 15년 있으면서 뭘 이루었냐”라고 묻곤 하는데, 다른 작가들은 성공하는 것이 목표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30년 머무는 것이 목표였기에 반은 이뤘다고 생각한다.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162x13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162x130cm

1999년, 변화를 선언하며 무려1만 6천여 점의 작품을 불태웠다. 작품을 불태우고 작업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와 이후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작품을 불태운 시기에는 한창 ‘밀레니엄’이 화두에 올라있었다.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언론에서 자주 노출되는 동시에 생소하게 느껴져서 2000년이라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선다는 것이 대단히 특별하게 여겨졌다. ‘그럼 나도 밀레니엄에 뭘 해야지’라는 결심이 섰고, 밀레니엄 전에 작품을 다 불태웠다. 그 전에서는 추상, 구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업을 했었는데,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열망과 자부심으로 모두 불태우고 블랙 페이퍼 작업에 몰두하게 됐다. 

그렇게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4년 정도 작업을 했더니 2004년에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에게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해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1m*70cm 사이즈의 블랙 페이퍼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200호 캔버스 작업이 없는지 묻는 것이었다. 없었지만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며칠을 연기해서 200호짜리 작품 5개를 그려냈다. 이 얘길 하면 다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배짱을 부렸냐”라고 묻는데, 나는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 때 이후로 블랙 페이퍼에서 다시 캔버스 작업으로 회귀했다. 그 동안 왜 캔버스 작업을 하지 않았냐면, 3m 가까이 되는 사이즈의 작품들은 80kg에서 100kg정도로 무게가 나가기도 한다. 작품을 불태울 당시 1만 6000점을 처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웃음) 

최근 작품에도 변화가 있었는가? 어떤 작업을 진행 중인지 궁금하다.

작업실에 오면 사람들이 이것도 네 거냐, 저것도 네 거냐, 오래 전 작품이냐라고 묻곤 할 정도로 다양한 작업을 한다. 자기 세계에 빠지면 객관적인 가치를 찾지 못하게 되기에, 매너리즘을 경계하고 끝없는 창작의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새로운 회화’에 대한 열망 속에서 2m정도 사이즈에 3000점에 이르는 신작을 제작 중에 있다. 또한 70세까지 그 중 드로잉을 2만 점 그릴 계획이라 종이를 매입 중이다. 사장님이 “종이 장사 합니까?”하고 묻더라. (웃음) 하루에 백장씩 그리니 10일이면 1000장을 그린다. 적당히 쉬어가면서 3년 동안 2만 점을 채울 예정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작가의 빠른 붓질이 “한국의 사극에 등장하는 검객의 칼 솜씨와 같다”라고 언급한 적 있다. 지금의 작업스타일이 자리 잡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거침없고 빠른 필치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내 작품의 표현 양식은 서양의 것을 따르지만, 검정색과 ‘일필(一筆)’이라는 동양화적 요소의 존재감이 강하다. 동양의 서체는 일 획의 내공이 엄청나다. 많은 서양화가들이 동양의 서체를 담아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내 그림에서는 왕희지, 추사의 깊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8센티 정도의 큰 붓으로 칼을 쓰듯이 그림을 그리면, 물감이 칠해지는 대신 날아가 붙는다. 원하는 곳에 날려서 꼽는 내공이 필요한 작업이다. 

작업 속도에 대해 얘기하자면,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북경에서 전시를 하던 당시, 관장이 한국에서 작품이 언제 도착하는지 물었다. “안 온다”라고 대답했더니, “전시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큰 미술관을 무슨 수로 다 채우려고 그러냐”라며 의아해 했었다. 

그 때 5m*4m 사이즈의 대형 캔버스를 만들어 벽에 세워뒀었는데, 작가들이 보더니 이 큰 걸 어떻게 다 그리냐라고 이야길 했었다. 그리고 3시간 반 후에 돌아오니 그림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구상 작품이라 디테일이 살아 있어 다들 깜짝 놀랐다. 그렇게 20일 동안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해나가 1층에서부터 3층까지 그 거대한 미술관을 다 채웠다. 윤진섭 평론가의 비유처럼, 정말 검객이 칼을 쓰듯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하다 보니,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안 믿곤 한다.

빠른 붓질의 가장 큰 단점은 ‘가볍다’는 것이다. 사람도 말이 빠르고 행동이 빠르면 경박해 보인다. 그러나 속도와 무게를 동시에 가진다면, 금속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날아가는 총알이나 대포알처럼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고 파격을 주는 것이다. 관객들이 내 그림에서 충격을 받는 이유는 무겁고 육중한데, 굉장히 빠른 붓질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고도의 테크닉과 작가의 호흡을 요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거기엔 나의 호흡이 담겨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의 작품임을 알아본다. 내 작업은 스피드와 육중함, 그리고 나의 호흡을 담고 있다.

▲사유의 손, 2010, 227x182, 캔버스에 혼합 매체
▲사유의 손, 2010, 227x182, 캔버스에 혼합 매체

인생작으로 2010년작인 <사유의 손>을 꼽아왔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항상 말하는 작품의 감상법은 “그림 속에서 작가를 찾지 말고 너 자신을 찾아라”라는 것이다. 이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흡족하진 않지만, 그 점에서는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나, 영향 받은 작가가 있는가?

중국의 팔대산인 (八大山人)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서양화는 양식의 발전을 거듭하지만 동양화는 팔대산인이 기운생동(氣韻生動)과 일필휘지(一筆揮之)를 완성시키면서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동양화를 했었냐고 묻는데, 작품 속 일필휘지의 힘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도 스케치가 없이 일필로 끝낸다. 

서양화가로는 피카소를 좋아한다. 피카소의 여러 면 중에서도 특히 창작을 향한 끝없이 도전적인 면모를 좋아한다. 피카소는 사후에도 끊임없이 신작이 나오는 화가다. 올해도 피카소의 도록을 샀는데, 여전히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나온다. 그 작품들은 ‘이것도 피카소의 작품인가?’싶을 정도로 새롭다. 그는 드로잉 제외, 페인팅만으로도 5만 5천여 점을 남겼다. 고흐, 마티스 등은 이제 더 나올 신작이 없지만 피카소는 아직도 미공개 작품이 무수하게 남아있다. 나도 5만점을 수장고에 보관해서 피카소처럼 후대에 남기고자 한다. 

작품에서는 작가만의 고유한 철학이 느껴진다.

철학자 후설과 들뢰즈, 푸코를 좋아한다. 특히 현상학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르트르의 틈새개념에 대해 중학교 때 처음 읽고, 58세가 된 후에야 깨달음을 얻었다. 긴 인생의 여정에서 찰나의 순간에 다른 세계를 보는 것, 나는 찰나가 아닌 영원히 그쪽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고 느꼈다. 사르트르는 찰나를 봤지만 나는 영원을 봤다.

요즘의 관심사나, 작품 세계를 확장시키고 싶은 영역이 있는지?

오랜만에 만나게 된 이들이 화가가 되었는지 물으면, 나는 “화가는 됐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아직 내 마음에 드는 명작을 그리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나는 명작을 그리기 위해 화가가 된 것인데 말이다. 

얼마 전에 전생과 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6생에서는 동서양을 융합하는 최고의 화가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나는 동서양을 융합하는 인류사적인 작품을 남기는 것이 꿈이다. 적당한 규모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5만점을 남기기로 계획을 세운 후, 최후의 수장고를 짓기로 마음 먹었다. 세상에 골동은 많지만 명작은 많지 않다. 인류가 멸망해도 지구에 남을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 예술은 물질의 한계를 넘어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명작의 요소들은 우리 세계에 없다. 나는 이 요소들을 그림에 싣고 싶다.

스스로가 표현주의 작가임을 거듭 강조해왔다.

예술이란 마주쳤을 때 감동을 줘야 하고, 형상이 있어야 한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은 직관적인 감동을 전제로 한다. 나는 로스코 작품을 보고 울었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한 종류의 감동은 학습에 의한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텍스트를 읽고 감동을 받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누가 그 텍스트를 설명해주겠는가? 예술이 주는 감동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들이나, 나이 든 노인,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전달이 되어야 한다. 사조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인간의 ‘표현’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산에서 이뤄진 팬미팅에서의 김길후 작가.
▲부산에서 이뤄진 팬미팅에서의 김길후 작가.

“예술이 꼭 아름다워야 하나? 예쁘게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작가는 ‘추의 미학’을 이야기해왔다.

꽃이 질 때, 혹은 밟혔을 때 더욱 아름답다고 느낀다. 드라마, 영화, 희곡도 비극적으로 끝날 때가 많다. 무엇이든 비극적으로 끝날 때 가장 아름답다.

김길후에게 예술은 무엇인지?

사실 예술이란 것이 뭔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사실 그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술이 뭐냐고 물으면 “물을 발견하기 위해 우물을 파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물이 나오지 않아도 계속 파다가 죽는 화가다. 사람들은 무모하고 어리석다고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덩이의 깊이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술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 무모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예술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 기사를 읽는 작가들이 있다면, 꼭 그리는 자신을 작품에 투영하지 않기를 바란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