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스티븐 해링턴: 스테이 멜로》…“내 눈에 패션 아이템들은 박물관의 유물과 같다”
[현장스케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스티븐 해링턴: 스테이 멜로》…“내 눈에 패션 아이템들은 박물관의 유물과 같다”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3.1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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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스티븐 해링턴 국내 최초 기획전…작업 세계 총망라
초기 판화 포함 대표 회화, 조각, 영상 등 100여 점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2024년 상반기 첫 전시이자 현대미술 기획전, 《스티븐 해링턴: 스테이 멜로(STEVEN HARRINGTON: STAY MELLO)》로 문을 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팝아트 작가 스티븐 해링턴(Steven Harrington)의 작업 세계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전시가 오는 7월 14일까지 찾아온다.

▲기자간담회 중 마련된 포토타임, 대형 벽화 작품 앞에 선 스티븐 해링턴 ⓒ김연신 기자
▲기자간담회 중 마련된 포토타임, 대형 벽화 작품 ‘진실의 순간’ 앞에 선 스티븐 해링턴 ⓒ김연신 기자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스티븐 해링턴은 스트릿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캘리포니아의 풍경과 문화가 스민 작업 세계로 주목을 받고 있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품의 이면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 고민했던 삶의 균형, 불안, 잠재의식 등에 대한 사색이 담겨있다. 처음에는 판화를 전공했던 작가는 판화에 담긴 디자인적인 요소와, 본격적인 작업 이전에 이미지를 먼저 창조하는 기법에 흥미를 느껴 지금의 회화 작업을 택하게 됐다. 

해링턴은 상업 브랜드와의 파트너십과 예술 작업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주체들과의 협업을 통해 영감을 얻기도 하고, 충만해진다고 느끼며 그 과정을 즐긴다”라며, “작업실에만 있었다면 전혀 하지 않았을 시도들을 하게 되기도 하고, 요청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작품들은 벽에 걸린 평면 회화나, 대형 설치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크록스 샌들, 대중들에게 익숙한 패션 아이템이나 오브제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패션 아이템들이 내 눈에는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유물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패션 아이템은 LA에 있는 박물관네 가서 19세기 말에 제작된 옷이나 바구니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문화가 어떤 상태에 놓여져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캐릭터 ‘멜로’에 대해 설명 중인 스티븐 해링턴. ⓒ김연신 기자
▲자신을 반영한 캐릭터 ‘멜로’에 대해 설명 중인 스티븐 해링턴. ⓒ김연신 기자

해링턴의 작업에는 잠재의식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멜로’와 야자수를 모티프로 한 ‘룰루’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캐릭터들은 작가 본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2015년경, 드로잉 작업에 몰두하던 작가는 불현듯 자신이 대부분의 이미지를 인간과 관련된 형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 인간의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고, 멜로가 탄생하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멜로는 “미국인인 작가 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나이나 인종 등에 구애 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만들어진 캐릭터”인 셈이다.

전시명인 ‘스테이 멜로’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캐릭터 ‘멜로’를 지칭하는 동시에 코로나로 인해 지난 몇 년간 겪었던 집 안에 머물러야했던 시간들을 반영했다. 집에 갇혀 어디도 갈 수 없던 시기, 작품 속에서 멜로는 ‘벗어나고싶다’는 작가의 마음을 담아 상상의 힘으로 우주와 같은 상상적 여행지로 모험을 떠난다.

▲《스티븐 해링턴: 스테이 멜로(STEVEN HARRINGTON: STAY MELLO)》 전시 입구 전경 ⓒ김연신 기자
▲《스티븐 해링턴: 스테이 멜로(STEVEN HARRINGTON: STAY MELLO)》 전시 입구 전경 ⓒ김연신 기자

전시는 크게 초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초반부에서는 비교적 최근 작품인 대형 회화들을, 후반부에는 작가가 각종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게 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해링턴은 이번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에도 주목했다. 개인적으로 건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건축가 데이비트 치퍼필드가 설계한 공간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직접 공간을 거닐며 공간적 특성에 맞춘 작품들을 준비했다. 특히 몇 개의 대형 작품들은 단순히 공간의 크기에 맞춘 것 뿐만이 아니라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람객들이 작품에 관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화이트큐브 형태를 채택하고 있으며, 타 미술관에 비해 전시장의 규모가 크고 천장이 높은 편이다. 그러한 전시공간의 특성에 맞게 이번 전시는 10미터 크기의 대형 회화를 비롯해 벽 한 면을 차지하는 크기의 대형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마치 벽을 뚫고 나오는 듯한 모습의 대형 ‘멜로’ 설치작품. ⓒ김연신 기자
▲마치 벽을 뚫고 나오는 듯한 모습의 대형 ‘멜로’ 설치작품. ⓒ김연신 기자

거대한 크기의 ‘멜로’를 표현한 설치작품은, 마치 어떤 구멍에서 멜로가 나와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 모습을 두고 “창조성이라는 것을 뚫고 멜로가 관객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의 경우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만큼 설치하는 과정도 복잡했다. ‘멜로’는 이 대형 설치작품 뿐만이 아니라, 전시실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조각으로 마주칠 수 있다.

‘Getting Away(2021~2023)’, ‘Stop to Smell the Flowers(2022~2023)’ 등 대표적인 연작도 볼 수 있으며, 이외에 초기 판화 작업, 종이와 디지털 형태의 드로잉, 작가의 스케치북, 관련 영상 등을 전시해 작가의 작업 세계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작가는 “현재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주로 하고 있지만, 디지털 기법을 수용하는 것 또한 무척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전시는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스티븐 해링턴의 작업을 함께 조명한다. 나이키(NIKE)의 한정판 운동화 및 베이프(BAPE)의 베어브릭 피규어, 몽클레르(Moncler), 이케아(IKEA), 유니클로(UNIQLO), 이니스프리(Innisfree) 등과 함께한 여러 작업물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순수 미술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닿을 수 있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크록스 등 브랜드 협업 제품을 소개하는 작가의 모습이다. ⓒ김연신 기자
▲크록스 등 브랜드 협업 제품을 소개하는 작가의 모습이다. ⓒ김연신 기자

작가에게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아바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브랜드 제품들을 모아둔 공간에서 우측에 위치한 캐릭터 피규어들은 작가가 좋아하는 힙합 프로듀서의 모습을 재현했다. 평소 엄청난 힙합 팬이라고 밝힌 작가는 “평소 좋아하던 프로듀서와 협업하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라며,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싶어해, ‘콰지모토’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를 만들고 의류를 제작했다”라고 덧붙였다.

전시 마지막 공간에는 가로 10미터, 세로 4.5미터 크기의 대형 벽화가 있다. 미술관을 처음 둘러보면서 작가는 ‘이 벽에 맞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작품의 제목은 ‘진실의 순간’으로, 오늘날 환경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표현해냈다. 언뜻 보면 재치있고 유희적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작품을 자세히 보면 이미 시작된 절망적인 상황 속 인물들이 도망쳐야할지 고민하는 순간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거리에서 그리는 벽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이번 전시를 위해 설치된 가벽에 직접 그려낸 것이기도 하다. 

한편,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작가가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아티스트 토크’를 3월 8일 개최하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전시 연계 이벤트를 계획 중이다. 또 뮤지엄 샵에서는 전시 기념 한정판 아트 토이와 함께 글로벌 아웃도어 브랜드 헬리녹스(Helinox)와 협업한 아트 상품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