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우리는 상상으로 어디든 떠날 수 있어”…리너스 반 데 벨데 개인전
[현장스케치] “우리는 상상으로 어디든 떠날 수 있어”…리너스 반 데 벨데 개인전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3.21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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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아트선재센터 2·3층, 스페이수 이수
드로잉, 회화, 영상, 조각, 설치 등 50 여점 전시
5월 말 전남도립미술관 순회 예정
허구임을 드러내는 허구적 세계로의 초대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집돌이’들은 때론 상상으로 현실보다 더욱 다채로운 세계를 여행하곤 한다. 벨기에 작가 리너스 반 데 벨데(Rinus van de Velde)는 그러한 상상력으로 똘똘 뭉친 ‘집돌이 작가’다. 아트선재센터와 스페이스 이수는 오는 5월 12일까지 스스로를 ‘안락의자 여행자’라고 소개하는 리너스 반 데 벨데의 작업세계를 조망하는 전시, 《리너스 반 데 벨데: 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를 개최한다. 지난 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리너스 반 데 벨데의 상상적 공간을 직접 거닐어 볼 수 있었다.

▲연출된 공간 속 리너스 반 데 벨데 작가. (사진=아트선재센터)
▲리너스 반 데 벨데, <라 루타 내추럴>, 2020-2021, 단채널 비디오, 13분 34초, edition of 3 and 2 A.P. © Rinus Van de Velde, Courtesy of Gallery Baton

욕조 안에서 공상으로 떠나는 여행

집이나 작업실에 하루종일 머무는 것을 선호하는 작가는 집 안에서 상상하며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때로는 현실보다 흥미진진한 상상의 세계를 예술적 탐험으로 풀어낸다. 전시 제목인 《리너스 반 데 벨데: 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에는 이러한 작가의 성향이 드러나 있다. 

제목은 앙리 마티스가 그림 그리기에 가장 좋은 빛을 찾기 위해 프랑스 남부로 여행을 떠났을 때 한 말을 인용한 반 데 벨데의 작품 제목 ‹나는 해와 달과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2023)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작품 밑에 이 인용문을 써서 빛을 찾아 여행한 20세기의 야수파 화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편,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이국적인 세계로 상상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작업관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상상력의 힘”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짐을 싸고 문 밖에 나가 여행을 떠나는 대신, 침대나 안락의자에 머무르며 내적 여행을 떠나는 편을 택한다. 역사책, 미술서적, 영화 등에서 받은 영감을 출발점으로 삼아 공상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상상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이며,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무언가를 현실에서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상상하는 것이 더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공상은 강력한 도구이며 우리가 현실을 성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리너스 반 데 벨데, 작가 인터뷰에서 발췌.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아트선재센터 2층, 3층 그리고 스페이수 이수 두 가지 공간에서 리너스 반 데 벨데가 구축한 상상의 공간을 재현한다. 아트선재센터 2층과 3층 전시공간은 비슷한 구조로 구성해, 꿈과 같은 데자뷰를 느끼도록 한다.

▲2-2.	리너스 반 데 벨데, 친애하는 에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2023, 110 x 73cm. © Rinus Van de Velde, Courtesy of Gallery Baton
▲리너스 반 데 벨데, 친애하는 에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2023, 110 x 73cm. © Rinus Van de Velde, Courtesy of Gallery Baton

집 밖의 외광파로 변신하는 페르소나

작가는 회화,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현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는 순환적 내러티브를 탐구해왔다. 평행 우주이론에 관심이 많은 그의 작업에는 여러 분신이 등장한다. 평면 작업에서는 작가를 닮은 인물이 등장하고, 영상작업에서는 작가의 얼굴을 본뜬 마스크를 쓴 배우가 연기를 한다. 

그는 작품 속 ‘분신’을 통해 과거의 시대를 살거나, 앙리 마티스, 몬드리안, 에밀 놀데 등 역사적 인물들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한 ‘허구적 대화’가 작가에게는 “그들을 이해하는 새롭고 대안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작업실을 원체 떠나지 않는 자신과 반대급부에 있다는 점에서 외광파 화가들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허구적 자서전’에 기반해 주로 외광파 화가들로 변신한다. 3층 전시공간에서는 외광파 화가들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식물 모형 등을 통해 작품으로 드러나는 전유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외광파 회화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내 현실과 가장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 중요한 것은 꿈과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를 상상하여 상상의 풍경에 도달하거나 과거의 외광파 화가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것, 그 예술 운동을 이해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는 꿈과 욕망이다.”

—리너스 반 데 벨데, 작가 인터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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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너스 반 데 벨데: 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 2층 전시 전경

이것은 허구다! 현실과 거리두기

리너스 반 데 벨데의 작품은 연극적 요소를 과장하며 ‘허구’임을 굳이 숨기거나, 진실처럼 위장하지 않는다. 작가를 본뜬 마스크는 영화 <아네트>에서 움직이는 목각인형 ‘아네트’처럼 실제 작가와는 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인데다가, 마스크를 쓴 인물의 행동은 찰리 채플린과 같은 과거의 무성영화 배우들처럼 과장되고 ‘연기적’이다. 

2층 전시장에 놓인 오픈카 모형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실제 차와는 다르게 연약한 골판지로 만들어져, 잘 살펴보면 ‘가짜’임이 금세 드러나고, 관객이 영화적 환영을 보고 있음을 환기한다. 오픈카가 등장하는 작가의 단편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 앞에 배치된 ‘가짜’ 차는 마치 관객들에게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것만 같다. “이것은 허구다!”라고.

영상작품들은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현실과 거리두기를 행한다. 그와 동시에 영상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작은 크기인 건물 모형이나 딱딱한 과일 등 영화 속 ‘소품’들을 전시장에 함께 배치해둠으로써, 관객이 접하게 되는 세계가 허구임을 인지하게 만들고 소격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핍진성을 통한 줄다리기를 하기보다는 관객이 허구임을 인지하고 허구적 대상이 창출하는 현실과의 거리감과 허구적 대상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다.

▲바다를 연출한 공간이 보이는 TV
▲바다를 연출한 공간이 보이는 TV

허구의 삶을 우회하는 여정의 끝

그의 작품은 한 세계에 동화되고 머무르지 않도록, 끊임 없이 다른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관객은 영화 <홀리 모터스>에서 드니 라방이 리무진을 타고 9개의 삶을 연기하듯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탐험한다. 외광파의 시대 모네가 그렸을 법한 자연 풍경 속을 거닐다가, TV라는 매개를 통해 조르주 멜리어스의 영화 <해저 2만리>에 나올법하게 연극적으로 연출된 세트장 속으로 초대 받기도 한다. 

애니메이션(Animation)이 ‘생명의 숨결’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됐다면, 작가는 팀 버튼의 과거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 등장할법한 기괴한 모형들을 통해 ‘살아있지 않은’ 역설적인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며, 관객이 경험하는 것이 거짓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트장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은 크기의 건물 모형이나, 과거 할리우드의 세트장처럼 작위적인 모양새에 내부 장치가 훤히 보이도록 문을 열어둔 바위산 모형 역시 허구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마찬가지다. 

▲스페이스 이수 전시 공간,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벨기에 대사의 모습이다.
       ▲스페이스 이수 전시 공간, 작품 ‹소품, 터널›(2020) 앞에서 사진을 찍는 벨기에 대사의 모습이다.

리너스가 작품 밖으로 확장시키는 가상의 공간은 한 곳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시는 작가가 말하는 ‘평행세계’처럼 다소 거리가 있는 두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스페이스 이수 전시공간에는 아트선재센터에서 재생되던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이 수직으로 오르내리던 원통형 공간 모형인 ‹소품, 터널›(2020)이 수평으로 배치돼 있다. 영화를 보고 온 관객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뒤늦게 영화 속 세계와 거리두기를 행하고, 영화 속 배경을 하나의 소품이자 오브제로서 감상하게 된다. 아트선재센터에는 가상의 소품 앞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며 동시성 속에서 작품 속 세계의 허구성을 인지해낼 수 있었다면, 스페이스 이수에서는 분리된 공간에서 시간차를 두고 기존에 봤던 가상 세계가 허물어지는 방식이다.

현실을 경험하는 대신 허구를 탐구하기로 택한 작가, 리너스 반 벨데는 그가 설계한 시뮬라크르에서 가상을 가상으로 인지함에서 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전시는 상상과 현실, 가짜와 진짜, 미술과 언어 등이 충돌하며 긴장을 일으키고 또 서로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삶과 예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다면적 시야를 열어준다. 관객은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가짜’임을 인지하는 순간 오히려 자유로운 허구세계의 미혹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