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하태형: '들꽃처럼 피우시게' 그리고 불같이 일어서시게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하태형: '들꽃처럼 피우시게' 그리고 불같이 일어서시게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4.03.2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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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하태형의 그림을 보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림이 어둡고 칙칙해서 그럴 것이다. 금속의 녹을 방지하기 위해 칠하는 검정색 콜타르로 그린 그림들. 때로는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흰 모델링 페이스트를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90년대 초반의 감각적으로 뛰어난 설치와 회화작품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전체적으로 암울한 폐허를 연상시키는 하태형의 이런 작품들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자못 궁금했었다. 궁금증이 풀린 것은 그의 설명을 듣고나서였다. 아주 오래 전에 작업실이 전소됐던 것. 초기작업을 담은 슬라이드 한 점 건지지 못한 채 잿더미가 됐다 한다. 그러니까 짐작컨대, 어둡고 칙칙한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마도 하태형에게 찾아 온 어느날의 불행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작품이 작가의 의식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하태형이 겪은 체험은 실존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 또한 실존적 풍경이라고 해야 옳다. 그가 사용하는 금속의 방청재와 그림의 주제인 부패에는 일종의 역설이 성립한다. 금속의 녹을 방지하는 콜타르로 세상의 부패에 대해 발언한다는 이 아이러니야말로 하태형만의 독자적인 발언에 해당한다. 이를 반 고흐가 그린 농부의 구두에 대해 평한 하이데거의 진리의 비은폐성(드러남)에 빗대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하태형의 그림에는 세상의 부패에 대한 우려가 배어있다. 이는 의식이 있는 작가라면 의당 취해야 할 태도이지만, 그것은 또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선택에는 여러가지 길이 가능하다. 삶은 곧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탐색의 실천에 다름아닌 것이다. (2022.10.22, facebook)

며칠 전, 작가 하태형과 모처럼 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작업실 문제로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았다. 오래 전에 예상치 못한 작업실 화재로 작품 하나 건지지 못하고 불 탄 화재 현장을 망연자실한 눈길로 바라봐야 했던 그다. 

세상에 이런 불행이 또 있는가. 그 이후 그는 잿빛 일색의 그림을 그려왔다. 여기에 실린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다. 어둡고 칙칙한 회색과 갈색톤의 그림들. 그것들은 하이데거의 잘 알려진 표현을 빌리면 '진리의 비은폐성'을 담고 있다.

삶을 떠난 예술은 공허한 것이다. 아무리 상상에 의한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해도 그 상상조차 삶에서 분비된 육즙이라는 사실을 용인한다면, 인간의 좌절과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인한 의지를 담고 있는 그림은 숭고하다. 하태형의 그림들은 시지프스 신화를 내밀한 언어로 오늘 이 자리에 호출한다. 부디 세상에 눈 밝은 큐레이터 한 명쯤 있으리라는 나의 믿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2024. 2. 30, facebook)

이제까지 나는 두 차례에 걸쳐 하태형의 작품과 그가 처한 현실적 상황에 대해 발언했다. 실제로 작품활동을 해 본 나로선 이러한 상황이 매우 보기드문 사건이란 걸 잘 안다. 70년대 중반 이후 50년간 미술계에 몸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실제로 봐 왔지만 하태형에게 닥친 이런 화재는 처음이다. 어떻게 초기 작품의 슬라이드 하나 건지지 못한 채 사그리 불타버릴 수 있는가. 친구를 만나러 가기위해 외출을 하던 중, 뭔가 섬찟한 것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작업실에 불길이 치솟더란다.

하태형은 지금도 그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태형이 대단한 것은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작업에 정진, 개성이 뚜렷한 회화세계를 일군 점이다. 폐허를 연상시키는 하태형의 회갈색 그림들은 얼핏 안젤름 키퍼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보기의 인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태형의 그림들은 인간의 운명과 세계에 대해 던지는 작가자신의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자신의 실존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의 보편적 가치에 진입하려는 하태형의 이같은 노력은 미래의 어느날 펼쳐지게 될 작품의 실제 파노라마를 통해 입증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장관을 보게 될 관객들은 지난 날 몸서리치게 겪은 작가 하태형의 정신적 방황과 고뇌가 육화된 화면들을 보면서 자신의 운명에 감정이입하리라. 

한편의 예술작품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예술이 지닌 힘이라면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묻는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너는 내게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