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최우수상 수상자] 이민혁 작가 “통렬한 시선으로 서울의 밤을 그려 온 주변부의 화가”
[서울문화투데이 최우수상 수상자] 이민혁 작가 “통렬한 시선으로 서울의 밤을 그려 온 주변부의 화가”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3.28 1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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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도시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주변부의 존재였다”
행동하는 예술가…사회 문제 정면으로 응시해와
‘탱고 시리즈’ 통해 새로운 공감각의 세계 열고 싶었다
3년 전부터 큰 변화 생겨…나이프가 만드는 우연성에 집중
일상 속 저마다 다른 속도에서 착안한 ‘심리적 원근법’
“일상적 풍경과 평범한 소시민을 그려내는 평범한 예술가로 살고 싶다”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도시의 풍속화가, 이민혁은 도시의 욕망과 어두운 이면을 캔버스에 담아왔다. 불나방 같이 이끌리게 되는 도시의 밤, 화려한 네온 사인, 술에 취한 사람들, 기쁨에 젖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등 서울의 민낯을 담아온 작가의 시선에는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서려 있다.

▲이민혁 작가
▲이민혁 작가

윤진섭 평론가가 “탁월한 풍속화가로서 이민혁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풍자성”이라고 말할 만큼, 이민혁은 예술가로서 ‘행동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그는 본인 역시 사회의 주변부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작품을 통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사회 시스템을 주제로 한 ‘관공서 시리즈’나, 정치적인 상황을 다룬 ‘바나나나라의 공주-허어엉 공화국’ 등을 통해 통렬한 시선으로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해왔다.

그런 그가 돌연 “도시를 떠나 자연인이 되려고 했다”는 심경을 고백했다. 지난 1월에 개최된 본지 창간 15주년 기념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시상식 수상 소감 중의 발언이다. 담담한 어조로 힘든 시기와 역경이 한차례 지나간 후를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삶의 질곡을 겪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이민혁 작가는 강렬한 화풍의 ‘탱고 시리즈’로 서민들의 삶의 애환과 탄식을 담아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미술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번 인터뷰는 수상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층인터뷰로 수상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았다. 주변부의 예술가이자, 도시의 풍속화가로서 겪어온 굴곡과 그 과정에서 작업방식과 예술세계에 나타난 큰 변화까지,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이민혁 작가의 작업실 한 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LP들.
▲이민혁 작가의 작업실 한 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LP들.

옛 물건들에 대한 애착이 크고, 잘 버리지 못 한다는 그의 작업실 구석구석에는 세월을 담은 수집품이 가득했다. 대중가요부터 헤비메탈, ‘탱고 시리즈’를 만든 탱고 음반까지, 고등학생 때부터 수집한 다양한 장르의 LP들은 한 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카세트 테이프와 오래된 스피커, 오래된 TV가 한 시대를 표기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을 끈질기게 기록해온 화가 답게 수집품들은 시대와 공간을 붙들고 기억을 쌓아 올리는 기록의 흔적과 같았다. 

한 켠에는 현재 작업중인 대형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작가가 최근의 작업이라며 꺼내 온 대형 캔버스 작품들은 음울하게 빛나는 밤거리와 같은 색채의 기존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태양빛과 같은 밝은 색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3년 전 ‘내 안의 태양’이라는 작품을 기점으로 이민혁의 작업스타일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공간과 시간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대신 ‘심리적 원근법’이라는 개념에 집중해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편을 택했다. 늘 공간과 사람이 작품의 중심에 있던 작가에게는 큰 변화였다. 

▲내 안의 태양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이민혁 작가.
▲‘내 안의 태양’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이민혁 작가.

- 지난 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창간 15주년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미술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다시 한 번 수상 소감과 이후의 근황을 듣고 싶다.

개근상 이후로 살면서 상이란 걸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데, 2005년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상과 인기작가상으로 두 개의 트로피를 처음 받고 감동받아 그날 밤 트로피를 안고 잤던 기억이 있다. 긴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서 수상 소감을 며칠간 고민했다.(웃음) 뻔한 얘기를 하는 것 보다 놓여있는 상황과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싶어서 현실적인 부분들과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었다.

상을 받은 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동네사람들과 플랜카드를 설치한다고 하셔서, 부끄럽다고 손사래를 쳤다.(웃음) 주변에 인생을 걸고 작업을 하거나, 더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도 많기 때문에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해서 몇몇 작가와 블로그에만 알리고 조용히 지냈다.

예술가에게 상은 그 순간에는 힘이 되지만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로서 앞으로 더 많은 넘어야 할 고된 길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도 됐다. 동시에, 그에 맞는 위치로 더 성장해서 그 상에 대한 감사함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열심히 해서 작업으로 내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 

- 이날 수상 소감에서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몸과 마음이 많이 다쳐,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갈 준비를 했었다”라며, “그 때 자연인이 될 팔자가 아닌, 예술가가 될 팔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원래의 나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3,40대 때는 잘 곳 없는 작가들을 열 명 가까이 재워 주기도 했다. 때가 되니 다 멀어지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알게 되니 인연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서 얼마에요?” 하고 묻는 말이 그날 하는 대화의 전부인 경우가 잦았다. 

그러다보니 서울에 머무르나, (청소년기를 보낸)춘천에 있으나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고 여겨졌다. 또, 골목골목 어린 시절의 감성이 묻어 있어, 과거를 회상하며 따듯한 작업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의 선택의 폭이나 교육, 생활비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도 도시에 대한 작업은 계속 나올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코로나 시기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 번이나 코로나에 걸리면서 고립된 상황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멀어짐, 전시 취소, 내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 등 심리적인 상황들로 여러 병들이 함께 왔다. 그동안 버텨온 건 내 그림을 지지해준 사람들의 힘이었는데, 내 작업이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 되니 버틸 수가 없었다. 서울의 월세나 생활비 등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이제 서울을 벗어나도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고향인 화천으로 가서 아버지 소유 부지인 산 아래 작업실을 꾸미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산은 내가 아닌 내 아들에게 물려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자연인이 아닌, 예술가로 살아야 할 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미술) 수상자 이민혁 작가 (가운데)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미술) 수상자 이민혁 작가 (가운데)

- 고향 화천에서 그림을 시작하게 된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

시골에 위치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화가’로 불리었다.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 중 네 개가 뒤에 걸리면 그 중 세 개가 내 그림이었다. 작은 동네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듣다 보니, 한 달 동안 미술 선생님께 수채화를 배워 춘천에서 열리는 그림 대회에도 나가게 됐다. 운이 좋았는지 금상을 받게 됐고, 자연스레 중학교 진학 후에도 미술부에 들어가게 됐다. 

중학교 때도 대회에 나갔었는데, 당시 나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여서 대회에 참가한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미술부를 관두고 고등학교 올라가서 1학년때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화실을 다녔으나, 많은 방황의 시간들을 보냈다. 

- 삶에 많은 굴곡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술 세계와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 있는가?

중학교 이후로 고향을 떠나 지내온 기간이 길었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느낄 시간이 많았다. 2003년에는 아내와 갈라서게 되면서 집에서 맨몸으로 나오다시피 했다. 잠을 잘 곳도 없어서 작업실에서 생활하다가, 추운 겨울에는 찜질방이나 차에서 자곤 했다. 외톨이가 된 상황을 실감하면서 해소되지 않는 도시 속 공허가 담겨 칙칙하고 어두운 작품들이 나왔다.

2007년에는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잘 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채 1년도 되지 않은 좋은 시기가 끝나고, 10년동안 내리막길을 달렸다. 경제적 어려움이 10년이 지속됐다. 내가 반짝 주목받을 때 어려운 상황에 있던 주변 친구들도 다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니, 고립감이 더욱 커졌다. 

2013년에는 콜렉터나 갤러리에서 작품에 관심을 가져줘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이들에게 생활비를 보낼 여유와, 작업적으로 고민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씻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도 생기니, 탱고도 출 수 있게 됐다. 탱고는 함께 추는 춤이다 보니, 안 씻은 채로 출 수는 없지 않은가. (웃음) 안정감을 찾게 되면서 작업 영역을 사회적인 주제로 확장했다. 정치적인 상황과 진보적인 생각들이 작업에 녹아 들게 됐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존에 내 그림을 좋아해주던 사람들 중 그러한 방향성을 지지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경제적 어려움이 다시 지속됐다.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 버텨온 건 결국 운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다른 작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철학적으로 다룬다면, 내 작업의 대부분은 삶의 경험에 기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삶의 굴곡이 작업에는 좋은 영향을 미쳤다. 삶이 평탄해지면 오히려 느슨해지고, 작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116.4x90.8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천국으로 가는 계단, 116.4x90.8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 도시와 사람을 캔버스 안에 담아왔다. 도시와 인간, 많은 사람들에게 애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작가가 이 둘을 끈질기게 담아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품에는 관찰 주체로서 내 시각과 다른 사람의 시선과 감정이 공존한다. 내 시선으로 볼 때는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한 걸음 내딛기 힘든 풍경이기도 하지 않은가. 항상 주변에 관심이 많았기에, 소재를 늘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주변에서 찾았다. 그 중심에는 사람과 공간이 있다. 혼자 다니다 보니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욱 잘 들려왔고, 주변인들, 우리 동네, 풍납동 골목, 풍납동의 사람들, 벤치, 지하철 등 내가 잘 알고 있는 공간 내에서 숨쉬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그렸다. 

도시는 나에게 편안함과 불안감을 수시로 경험하게 한 곳이다. 힘든 상황 속에서 도시를 그려나가며 안정감을 찾고 치유의 과정으로 접어들고자 했다. 도시의 거리, 어두운 도시의 주변부, 소외된 사람들 등 내게는 전부 익숙했던 것이기 때문에 내 그림의 소재와 주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시 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고, 작품을 보는 사람이 공감하고 도시 속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도시 중에서도 서울의 풍경을 오랜 시간 그려왔다. 작가에게 ‘서울’이란 어떤 의미인가?

서울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다. 서울에 살던 동기들과 초저녁에 강남의 한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들이켰는데, 술에 얼큰하게 취하니 강 건너 건물들의 불빛, 네온사인 등이 훨씬 화려하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의 꿈과 야망이 모두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인기를 끌던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나 역시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현혹됐다. 모두가 욕망에 이끌려 불나방처럼 서울로 향하지만, 드라마의 결말처럼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화가로서 외면 받으며 마음이 울적해지면 한강으로 가 울적함을 도시의 불빛에 떠나 보내려 했다.

밤거리, 전국의 카페, 술집 등 다양한 도시의 밤거리를 찾아 다녔다. 작업실에만 머물러 있던 나에게 서울의 밤거리는 신세계와 같았다. 그 속으로 뛰어들 때면, 전에 없던 에너지가 생기고 흥분감을 느껴서 불나방처럼 타 죽는 줄도 모르고 방황했던 시간이 길었다. 그런 경험들은 작업적인 영감이 되어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서울은 끊임없는 쾌락과 좌절, 고통과 회복의 순환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게 했던 영감의 원천이었다.

▲바나나 정원1, 130.3x89.4cm 캔버스에 유채 2013
▲바나나 정원1, 130.3x89.4cm 캔버스에 유채 2013

- 작품에서 풍자성이 두드러진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탁월한 풍속화가로서 이민혁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풍자성이다. 만일 그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톡 쏘는 풍자가 없었더라면 아마 그가 그처럼 빠르게 각광을 받지는 못 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상적인 소재에 ‘풍자’를 적극적으로 곁들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도시 풍경과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그려 나갔다. 그때의 그림에는 도시의 속도와 대비되게 꾸물대며 멈춰 있는 존재, 혹은 그 속도에 맞춰 달려가는 존재들이 담겼다. 그 안에서 나는 항상 도시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존재였고, 어느 순간 우리가 도시속에서 좌절하고 고통받는 이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됐다.

나 역시 주변부에 있기 때문에, 소외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외 당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여러 번 실감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그리는 대신 의미를 숨기고 작품에 풍자와 해학적인 요소들을 넣기 시작했다. 

-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다뤄 왔다. 

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표현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웃음) 행동하지 않고 침묵을 택해 문제가 커질 때면, 어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 같다.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라도, 적어도 잊혀지면 안 되는 문제들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려왔다.

<관공서 시리즈>는 ‘권위를 뽐내며 꼿꼿하게 서있는 건물들을 해체해보자’라는 생각에 붓을 칼자루라고 생각하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 인사동에서 전시를 할 때에는 ‘이명박시대의 풍속화’라는 키워드로 기사가 나왔는데, 조회수가 10만을 넘어서고, 댓글창도 뜨거웠다. 전시장에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이 와서 조사도 하고,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도 왔었다. 그 때 통쾌함을 느끼며 자신감을 얻었다. ‘바나나 시리즈’는 박근혜 정부를 노골적으로 ‘공주’로 표현한 작업이다. 무력하게 잘려 나가는 바나나는 민중을 상징한다. 3년전부터 준비를 했는데, 전시 6개월 전 탄핵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어 그다지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뿌듯했던 점은, 전시장에 찾아온 어린 아이들이 작품을 좋아해줬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무거운 주제를 다뤘음에도, 그림만으로 아이들에게 직관적으로 닿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민혁 작가가 나이프를 쓰는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민혁 작가가 나이프를 쓰는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지금 작업 중인 작품들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최근의 작업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가?

원래는 붓만 쓰다가 주사기에 물감을 넣고 스크래치를 만드는 작업 방식을 거쳐 다시 붓으로 회귀했고, 요즘은 나이프를 사용하고 있다. 3년 전, 28년을 넘게 그어 온 붓질에 변화를 주고 싶었고, 최근 몇 년간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내 그림에서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색들이 자리잡게 됐다. 그 때 나이프를 통해 우연히 나타난 선의 변화와 밝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바람으로 그려진 첫 그림이 “내 안의 태양” 이다.

이 시기부터 ‘심리적 원근법의 회화’라고 명명한 새로운 스타일의 작업을 추구해오고 있다. ‘심리적 원근법’은 시간과 거리의 상대성의 인지에서 출발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저마다 다른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것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지만, 저마다 다른 시간을 이동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탱고를 출 때 역시 마찬가지로, 시간의 체감은 감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고 회화의 언어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선들이 겹치고 층위를 이루면서 만드는 원근법은 거리적 원근법이 아니라 심리적 원근법이다. 화면에 드러난 기억의 스크래치는 어느 순간은 거칠고 힘차게 다가와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 또 어느 순간은 흐릿한 기억들이 만나 겹치면서 스며들고 사라진다. 변화한 방식을 통해 다양한 심리적 시간의 나열이 가능해졌다. 다양한 색들이 만드는 순간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에서도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나이프는 붓처럼 캔버스에 직접적으로 긋고 밀착하는 대신 붙을 듯 말 듯 미묘하게 떨어져서 그어야 한다. 얇고 날카로운 나이프로 선을 그을 때는 발길이 길가에 고여 있는 빗물 위를 스치듯, 혹은 바람이 귓가를 살며시 어루만지듯 섬세하고 미세한 떨림을 느낀다. 나이프가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선들을 전면으로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돌발적으로 생겨난 선들의 자유로움에 점점 빠져들게 됐다. 사물의 형상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붓이 아닌 나이프를 사용하다 보니 형상과 의미에 대한 집착도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 관공서 시리즈, 한강 시리즈, 탱고 시리즈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작품에 변주를 줬다. 무언가 계기가 생기면 한동안 한 테마에 꽂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몰아치는 것 같다. 뭔가 억눌려있던 것이 폭발하듯 터지면, 그걸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결됐고, 작업 시리즈는 물 흐르듯 완성됐다.

첫 번째 개인전 “도시여행, 흘러가는 사람들”, 도시의 어두운 구석을 그린 “나는 바바리코트를 입고 서울여고로 간다”, 사회적 확장을 이룬 “관공서”, “한강 불처럼 숨쉬다”, 정치적인 상황을 다룬 “바나나나라의 공주-허어엉 공화국” 다음으로 집중하게 된 테마가 ‘탱고’다.

탱고를 통해 사회의 축소판을 경험하며 작업의 확장 가능성을 봤다. 이를 계기로 지금의 작업은 코로나를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가 아닌 ‘나 자신’으로 다시 회귀했다. ‘나’를 더 돌아보며 위로하고 편안함을 찾기 위해 태양을 품게 됐다.

▲J의 탱고, 116.7x91cm, 캔버스에 유채, 2017
▲J의 탱고, 116.7x91cm, 캔버스에 유채, 2017

- 작가는 탱고에 담긴 고달픈 삶의 애환을 그림에 녹여냈다.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탱고를 추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이 짝을 이뤄 바닥에 발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탱고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탱고 작업을 할 때는 그림에서 음악에 들리는, 공감각을 통해 작가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고 싶었다. 탱고와의 인연은 아주 어렸을 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다섯 살 때, 할머니의 부탁으로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드리곤 했는데, 그 때 들어서인지 탱고는 어쩐지 너무 익숙한 느낌이었다. 

도시 속에서 가장 인간의 욕망과 번뇌가 함께 공존하는 곳에 가서 직접 경험하고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 탱고 판을 찾게 됐다. 사회 경험이 많이 없던 나는 마치 사회의 축소판 같은 탱고 판에서 사회를 배웠다. 나는 나이트에 가도 춤을 추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 도망치고는 했는데, 탱고는 앞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에 보호받는다는 느낌도 들고 긴장과 부끄러움이 덜했다.

탱고 판에는 카피댄서와 프로댄서가 따로 있다. 카피댄서는 대가들의 동작을 흉내내는 것에 그치기에 아무리 잘 춰도 인정을 못 받는다. 탱고는 ‘창의적 행위’가 아주 중요한 춤이다. 탱고를 통해 그림에서 느끼지 못하는 예술적 감성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은 “내 안의 태양” 시리즈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머리를 밀고 외출을 줄이고 있으며, 탱고도 멀리하고 있다. 탱고 판에서 예술적 열정을 쓰고 나면 작업실에서 예술적 표현을 위해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들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 탱고 외에도 평소 영감을 받곤 하는 타분야가 있는가? 음악, 문학, 철학 등... 지금의 작가를 만든 귀감이 있는지 궁금하다.

대중 가수 중에는 정태춘 선생님, 한대수 선생님의 글과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여러 분야에서 감동을 잘 받곤 하는데, 특히 오래된 옛 물건의 추억과 감성이나 음악이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LP를 수집하는 것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6,7,80년대 LP를 보면 자켓만 봐도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지 않은가. 물건에서는 그 시대가 느껴진다. 물건 안에서 살아 숨쉬는 시대의 감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다 보면 없던 감성도 생기는 것 같다. 작업실에 과거의 유물과 같은 소품들이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는 이유다.

▲내 안의 태양, 162x97cm, 캔버스에 유채, 2021
▲내 안의 태양, 162x97cm, 캔버스에 유채, 2021

- 앞으로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지금껏 그래왔듯 나는 환경과 주변 사람들을 떠나서는 결과물을 만들기 힘든 사람이다. 기쁨과 슬픔과 영감을 주는 곳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체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천식으로 1년정도 밤에 누워서 잠을 자지 못했고 다른 병들이 겹쳐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다 보니, 회복되고 난 후에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반갑고 그냥 거리를 걷는 것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복 후 시내버스를 타고 전국여행을 하면서 작은 것에서 오는 감사함이 커졌다. 걷는 것의 기쁨이라던가,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들이 수다 떠는 것을 듣는 것 등 그 전에 몰랐던 것들에서 오는 행복을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나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들은 전부 특별한 공간이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것들이었다. 앞으로도 주변에서 보여지는 일상적 풍경과 평범한 소시민을 그려내는 평범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