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17회
[연재] 딱지 17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10.02.25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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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발표 (2)

6. 발표 (2)

에이 그럴 리가 있어요. 1억이 누구네 집 강아지 이름인가요?
나 이런 답답한 놈의 인간을 보았나.

수동씨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이렇게 말귀가 어두우니 그 알량한 미국소설이나 번역해서 먹고살지. 우리나라 재벌들, 말죽거리의 그 수많은 졸부들이 다 무얼로 돈을 번 줄 알아? 바로 땅이야 땅. 낼모레면 나이 사십인데 세상물정에 이렇게 어두우니 어쩌면 좋으냐?

정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그 많은 땅을 다 어디에다 녹였소 하는 소리가 입 안에서 뱅뱅 돌았다. 마침 그때 벨이 울렸다. 407호의 길자가 참지 못하고 달려 온 것이다.

방금 뉴스 보았어요?

그녀도 수동씨와 똑같이 흥분해서 수동씨와 똑같은 얘기를 했다. 모르고 있는 것은 정구와 미순뿐인 것 같았다. 수동씨와 한참 동안 딱지 얘기를 나누던 길자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 이러지 말고 회장한테 가 봅시다. 회장님이면 뭔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날 밤 9시 뉴스를 본 학동주택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203호 회장댁 현관에는 이미 신발을 벗어 놓을 자리도 없었다. 안 그래도 손바닥만한 집안에 빼꼭하게 들어찬 사람들이 저마다 목청껏 떠드는 바람에 203호는 꼭 일산 장바닥 같았다. 미순과 길자는 발을 들여 놓을 수도 없었다. 그저 목을 길게 빼고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궁금증을 풀어 줄만한 얘기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수동씨나 길자가 이미 알고 있는 얘기들만 어지럽게 오고 갈 뿐이었다.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여기서 이래 봐야 아무 소용 없으니 다들 돌아가요. 내일 내가 이장님하고 군청이랑 찾아 다니면서 자세히 알아 본 다음 얘기를 해 줄 테니까 내일 다시 만나요. 그만들 돌아가요.

회장의 제의가 그럴듯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앵두보살이 올해는 대운이 들어 돈벼락을 맞겠다고 그러더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던 모양이에요.

돌아오는 길에 길자가 말했다.

앵두보살이 누군데요?
아직 몰라요? 예배당 옆집에 앵두보살이라고 아주 용한 점쟁이가 하나 살고 있어요.

미순은 다시 한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같은 주택에 사는 사람한테 똑같은 점괘가 나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구나 수동씨한테는 진짜 돈벼락을 맞을 때까지 입도 뻥긋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삽화 문길시인

학동주민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그 이튿날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스피커에서 회장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미순은 후다닥 베란다로 달려 나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정구와 수동씨도 그 뒤를 따랐다.

오늘 저녁 일곱시에 신도시개발에 대한 주민 대책회의가 있을 예정이오니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마을회관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빨리 저녁 먹고 가 봐라.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미순보다도 수동씨가 더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밥상을 물리기도 전에 길자가 찾아왔다. 빨리 가자는 것이다.

아직 여섯시 반밖에 안 됐어요.
밖에 좀 내다 봐요. 벌써부터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고 있어요. 우리 없는 새 중요한 얘기 다 끝나 버리면 어떡해요? 빨리요.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고 가야죠.
지금 밥이 넘어가게 생겼어요?
먼저 가세요 그럼.

쿵쿵거리며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정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부실공산데 잘 하면 집 무너지겠다.
웃지 마.

수동씨가 나무랐다.

자그마치 1억이 왔다갔다 하는 판인데 너는 웃음이 나오냐? 저런 열성이 있어야 돈을 버는 법이야. 강남에서 땅투기로 떼돈을 번 것도 다 저런 여자들이었어.
아버님도 참.

미순이 항의했다.

찬홍이 엄마는 지금 이 집을 거저 빼앗길까봐 겁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어떻게 땅투기하는 복부인하고 비교할 수 있어요?
그런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말라니까. 누가 이 집을 거저 뺏어 간다고 그래? 박정희시절에는 국토개발을 하기 위해서 더러 그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법도 바뀌고 시대도 바뀌었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박정희나 노태우나 다 그 밥에 그 나물이죠 뭐.

정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재개발한다고 경찰까지 동원해서 산동네 철거시키는 거 보세요. 지금도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시대라구요.
글쎄 재개발하고 신도시개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니까. 넌 분당 얘기도 못 들어 봤어?
관심이 있어야 들어 보든지 말든지 하지요.
나 이런 답답한 놈의 인간을 보았나.

수동씨가 또 가슴을 치기 전에 미순이 얼른 말했다.

어서 진지 드세요. 마을회관에 가 보셔야잖아요?
늙은이가 뭐하러 그런 데까지 얼굴을 내미냐? 너희들 둘이 갔다 와.

그러자 정구가 말했다.

한 집에서 둘씩이나 갈 거 뭐 있어. 당신이 우리집 대표로 갔다 와.

정구뿐만이 아니고 대개의 남자들이 정구와 같은 의견이었던 모양이다. 마을회관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찌감치 모이는 바람에 대책회의도 그만큼 빨리 시작되었다. 이장이 종이쪽지 한 장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