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18회
[연재] 딱지 18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10.03.11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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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투쟁위원회

오늘 저하고 여기 최회장님하고 둘이서 군청이랑 건설부랑 토지개발공사랑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관청이란 데가 어떤 뎁니까? 백성들 알기를 발바닥으로 알고 봉투가 들어가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게 공무원 아닙니까? 그래서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기 계신 회장님께서 교단에 계실 때 가르친 제자들이 많아 가지고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호통을 쳐 가면서 애쓰신 덕분에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삽화/문길시인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열렬한 박수갈채였다. 그러나 회장 자신은 조용히 하라고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이장이 쪽지를 들여다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얘기를 종합해보건대 결론은 대강 이렇습니다. 첫째, 주택 2백만 호 건설은 대선 공약사항이기 때문에 일산 신도시개발은 반드시 실행한다. 둘째, 특별히 일산지구를 택한 것은 이곳이 수도권에 위치해 있고 국유지가 많아 토지수용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싯가대로 보상하여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하며 아파트 분양이나 택지분양에 우선권을 준다. 이상입니다.

이장은 사람들의 홍수와도 같은 질문에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여기다 아파트를 짓겠으니 너희들은 땅을 내놓고 다른 데로 나가 줘야겠다 이런 소리 아니야?

길자가 큰 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이장이 한 얘기 가운데 그런 내용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를 이거 털도 안 뽑고 날로 먹겠다는 수작 아니야? 믿어 주세요 해서 찍어 줬더니 등 치고 간 내 먹잖아?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너 죽고 나 죽고 한번 해 보자고 그래.

대책회의는 삽시간에 반정부 구호가 난무하는 성토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순도 무어라고 한 마디 외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또 3백만 원만 들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은 떨어지지 않고 공연히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돈벼락이니 1억이니 하는 소리들이 물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순의 걱정과는 달리 그로부터 사흘도 지나지 않아 학동주택은 깔끔하게 분양이 완료되었다. 정구네처럼 단돈 3백만 원만 들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오백만 원 전액을 싸 들고 와서 웃돈을 얹어 준다고 해도 이제 관리소장은 얼마든지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7. 투쟁위원회

회장이 미순에게 말했다.

새댁이 위원 한 자리를 맡아 줘야겠어.
위원이라뇨?
투쟁위원 말이야. 우리 주택하고 동네사람들이 뭉쳐서 투쟁위원회를 만들기로 했거든.
무슨 투쟁을 할 건데요?
무슨 투쟁이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정부에서 이미 결정한 거 투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 이런 답답하긴. 아, 투쟁을 해야 보상금도 올리고 우리들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받을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하고 가만히 있어 봐. 푼돈이나 집어 주고 부르도자로 싹 밀어 붙이고 말 텐데.
하지만 전 그런 거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누군 해 봤나?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앞장서 줘야 하니까 싫다는 소리 하지 마. 거기다 새댁은 아직 애기도 없고 홀가분한 처지잖아?

미순은 집에 가서 상의해 봐야겠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절대로 안 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애기도 없으니 홀가분하다는 말에 또 속이 뒤집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