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뉴욕 모던아트에 영구 보관된 한국의 영원한 아트필름 ‘오발탄’-
[연재 충무로야사] -뉴욕 모던아트에 영구 보관된 한국의 영원한 아트필름 ‘오발탄’-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3.1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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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작 '오발탄'
 한국 영화 100년사를 통해 문예작품의 시초는 민간설화이며 고전문학으로 운위되는 ‘춘향전’, ‘심청전’등을 제외하면 아마도 1937년 경성촬영소의 일본인 제작자에 의해 제작된 이태준의 ‘오몽녀’일 것이다.

‘오몽녀’는 영화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연출, 출연까지 한 춘사 나운규가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사가나 연구가들 중에서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먼동이 틀 때’를 꼽는 이도 간혹 있다. 그러나 ‘오몽녀’보다 10년이나 먼저 영상화된 상기 작품이 실제로 문예잡지에 발표했거나 단행본으로 출간한 규격화된 작품이었느냐, 한갓 영화를 만들기 위한 줄거리(스토리)에 불과했었느냐, 라는 논란을 참고하면 명확한 답을 얻어낼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후 이광수의 ‘무정’을 필두로 해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문예소설, 대중소설 등이 각색, 영상화되었고 우리 영화사에 획기적인 변화와 영향을 주었다. 서구에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각색, 영화화된 이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보리스 파스체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어네스트 허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 윌리엄 포크너의 ‘무덥고 긴 여름밤’등이 영화화되어 세계영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국내에서도 이효석, 황순원, 김동리, 이범선, 오영수, 박경리, 이청준, 김승옥, 황석영, 최인호, 조세희, 이문열 등의 장·단편 소설들이 무수히 영상화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60년대 초부터 붐을 이룬 문학작품 영상화가 19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퇴조되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 위주로 기획, 제작된 근저나 기류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 지면을 통해 섣불리 논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 사이버 시대로 진입한 이때에 문학과 영상의 상관관계 및 문자매체와 영상매체의 표현형식과 기능상의 접목을 누구도 안이하게 거론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은 문학의 독창적인 영역에서 영원한 것이고 존엄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는 기록적 측면에서 이 원고를 통해 한국영화사 조사에 근거하여 2000년대 초반인 현재까지 모든 매스컴과 영화사가들이 한국영화사상 가장 걸작이라고 공인한 이범선의 ‘오발탄’에 대해 기록하고자 할 뿐이다.

 한국문학사를 거론할 때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을 빼놓을 수 없듯이 한국영화사조사에서 또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수작의 반열에서 거를 수는 없을 것이다.

 1961년에 발표되어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수상하며 문단과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오발탄’은 그해 영화화되면서부터 논쟁적 작품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인간은 아마 모두가 신의 오발탄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 테마를 다룬 원작 내용은 당시 국내 정치상황과 사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월남 피난민으로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시도 때도 없이 고향 이북으로 “가자! 가자!”를 외치는 어머니, 영양실조에 걸린 만삭의 아내, 실의에 빠져 사고만 저지르는 남동생, 양공주가 된 누이동생, 고무신을 사달라고 매일 졸라대는 철없는 어린 딸, 이렇듯 각박한 환경속에서 이들을 부양해야하는, 치통 앓는 계리사인 주인공···.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가족 구성원, 즉 인물구성만으로도 논쟁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어쨌든 ‘오발탄’은 그 어수선한 시대 상황 속에서 ‘오발탄’처럼 제작되었다. 연출은 당시 신상옥, 김기영 등과 함께 문예영화만을 주로 연출했던 유현목 감독이 맡았고, 주인공인 계리사 역에 톱스타 김진규, 그의 아내 역에 문정숙, 사고뭉치 남동생 역에 최무룡 등 호화 캐스팅이었다.

 1940년대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네오리얼리즘’을 표방한 ‘코리언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개봉 후 한국의 지식층을 크게 자극했고 논객들과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흥행결과는 참담했다.

 세계영화사조에 찬연한 족적을 남긴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과 같은 케이스였다. ‘시민 케인’은 비록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후세 영화사가들에 의해 재평가된 빛나는 작품이었고, 오늘날 영화학도들의 필견의 작품이다.

 그나마 ‘오발탄’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상영이 금지되었다. 군사정권의 ‘오발탄’같은 문화예술정책 때문이었다.

 1965년, 각계의 지탄과 비난 속에 마지못해 해금된 ‘오발탄’은 그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요즈음처럼, 한국영화가 세계 시장과 영화제에서 관심을 끌던 때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영화를 만들고 있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한국영화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무했던 시절인지라 영화제에서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영화가 공개되자,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해했다고 한다. 도무지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결같이 정상적이지 않은데다가 극적 상황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정서 및 의식과 엇갈렸던 것이다. 영화를 보던 심사위원들은 하나 둘 극장을 빠져나갔고, 남아있던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의문을 제기했다. 대단한 실험영화나 전위영화도 아니었으나 그들에겐 너무나 난해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96년 ‘오발탄’이 뉴욕의 국제 필름 페스티벌 한국영화주간에서 한국영화의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돼 뉴욕의 모던 아트에 영구 보관된 사건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오발탄’은 한국에서도 떠들썩하게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신문, 방송 등 매스컴마다 ‘20세기 한국의 톱 영화’, ‘한국영화 50년사의 최고 걸작’, ‘20세기 가장 기억에 남을 영화’ 등 모든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온갖 수사와 찬사가 동원되었다.

 대학시절 이범선 선생님의 제자였던 필자로서 그러한 일련의 현상에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상시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재평가할 의사도 없었던 작품을 외국에서 재평가하자 그제야 덩달아 법석을 떨어대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학시절엔 동인문학상 후보작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던 기억이 난다. 수상작이면 수상작이지 후보수상작이란 또 무슨 이상한 발상인가 하고 나름대로 불만이었다.

 아무튼 이 기회를 통해 이범선 선생님의 ‘오발탄’에 대한 이러저러한 기록의 편린들을 미흡하나마 토로할 수 있음에 매우 의미있게 생각하며 제자로서 선생님의 대표작 ‘학마을 사람들’, ‘갈매기’등의 영상화를 주선했던 일과 현재도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유고 단편소설 ‘명인(名人)’의 영화화를 위해 시나리오 작업 중임을 부기해둔다.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