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19회
[연재] 딱지 19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10.03.24 1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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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투쟁위원회(2)

▲삽화 문길시인
안 해? 그 좋은 걸 왜 안 해? 부부간에 안팎으로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구먼.

수동씨는 화부터 냈다.

개도 짖는 개를 돌아본다고 이런 때일수록 앞장서서 떠들어야 실속이 생기는 거야. 한번 생각해 봐. 이건 정부와 주민들 싸움이야. 그리고 어차피 신도시개발은 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반대투쟁을 하는 건 보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자 이거야. 그렇게 되면 정부 쪽에서는 싫든 좋든 주민대표를 상대로 협상을 해야 하는데 주민대표가 누구야? 바로 투쟁위원 아니야? 투쟁위원한테 점심 한 끼라도 더 사게 돼 있다 이 말이야. 아직도 무슨 얘긴지 못 알아듣겠어?

저절로 굴러 들어온 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순은 조금도 내키지 않았고 정구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무슨 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런 걸 왜 맡아요? 그리고 사실 우리 주택 쪽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보상도 해 주고 딱지도 나온다면서요?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수동씨는 사정조로 나왔다.

제발 이 늙은이 말 좀 들어 다오. 옛말에도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그랬어. 어차피 여기를 싹 밀어 버리고 신도시가 들어설 텐데 보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챙겨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투쟁위원회라는 걸 만든 거고 앞장을 서서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저쪽에서도 그만한 대접을 하게 돼 있어. 제발 이 늙은이 소원 한번 들어 주는 셈 치고 투쟁위원을 맡아. 틀림없이 뭔가 돌아오는 게 있을 테니까. 내 손에 장을 지져도 좋아.

미순이 정구를 보았다. 정구는 그 시선을 피하면서 어눌하게 말했다.

아버지 소원이 정 그러시다면 뭐.

미순은 잔뜩 볼멘 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알겠어요.

투쟁위원은 주택과 마을에서 각각 다섯 명씩 열 명을 뽑기로 했다. 회장은 총무와 경애, 길자, 미순을 위원으로 뽑았다. 회장이 자신의 며느리까지 위원으로 뽑은 것은 그만큼 지원자가 없었다는 증거다. 다들 투쟁이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뺐던 것이다. 모두 여자들로만 뽑은 주택 쪽과는 달리 마을 쪽에서는 이장과 이장의 동생 상구, 수퍼 주인 만석, 그리고 정순철이라는 사내에다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하필이면 앵두보살 차연화였다. 그 바람에 투쟁위원회는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주민들의 사활이 걸려 있는 이런 중대한 일에 무당이 참가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위원들이 상견례를 겸하여 처음 만난 자리에서 회장이 이렇게 막말을 하고 나왔다. 평소의 회장답지 않게 엉뚱하면서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두 여자가 부딛칠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러나 정작 연화는 잔잔하게 미소만 지을 뿐 회장 쪽에 눈도 주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미소 때문에 회장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위원의 한 사람으로 요구하는데 이 자리에서 나가 주기를 바랍니다. 여기는 우상을 숭배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미신으로 현혹시키는 그런 사람이 참석할 자리가 아닙니다. 이장님 내 말이 틀렸습니까?

이장한테 응원을 청한 것은 회장의 실수였다. 흥분한 나머지 무당과 이장이 한 마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 하지못했던 것이다. 이장이 말했다.

회장님 기분은 잘 알겠는데 여기 차연화씨는 지금 우리 동네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겁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 아닙니까?
물론 있지요. 하지만 굿을 하고 점을 치고 하는 건 종교가 아니고 미신이에요 미신.
글쎄 미신이 됐건 무엇이 됐건 아무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간섭할 권리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앵두보살님은 우리 동네사람들이 옛날부터 믿고 존경하는 분입니다. 회장님이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회장은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기 편을 들어 줄 줄 알았던 이장의 강경한 입장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거기에다 상구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에이 씨 투쟁위원회라는 게 처음부터 뭐 이래? 그럼 교회집사만 사람이고 무당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거야 뭐야?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기독교국가가 됐어?
무슨 말버릇이 그 모양이냐?

이장이 정색을 하고 동생을 나무랐다.

여기가 동네 사랑방이냐? 너 앞으로도 그따위로 하려거든 여기서 지금 빠져.
회장님이 먼저 무리한 말씀을 하셨잖아요? 알았어요. 앞으론 입 꽉 다물고 있을게요.

회장은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봐요. 없었던 일로 하지요. 보살님 미안합니다.

무당이 금방 보살님으로 껑충 뛰었다. 연화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까딱 해서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는 했지만 회장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선 것은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