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먹구름과 전쟁 실황
천둥 먹구름과 전쟁 실황
  •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3.2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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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국화꽃이 일왕 히로히토인 이유

그리고 굳이 그 태어난 과정에 의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가리려면 그 과정 자체가 바른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먹구름 속의 천둥 번개는 그런 이미지가 없다.

먹구름과 천둥소리에 가장 가까운 비유적 풍경은 전쟁이다. 총소리 대포소리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융단 폭격이 바로 먹구름과 천둥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다. 이보다 더 가까운 이미지는 절대로 따로 없다.

천둥과 먹구름은 무대가 하늘이다. 그런 하늘의 무대를 그처럼 먹구름으로 만들고 번쩍번쩍 불이 일게 하고 온 세상이 무너질 듯 굉음을 낼 수 있는 것의 가장 가까운 비유는 전쟁밖에 없다. 길바닥의 뻥튀기는 귀청이 떨어진다 해도 이에 비하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부엌의 프로판 가스 폭발도 그 규모는 하늘의 먹구름과 천둥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전쟁 속에서는 그야말로 하늘로 먹구름이 치솟고 불길이 치솟고, 몇 십리 밖에서 일어난 전쟁은 검은 하늘에 천둥 번개치는 경우와 너무 비슷하다. 그러니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다는 것도 가장 가까운 이미지대로 바르게 읽으면 전쟁을 했기 때문에 그 꽃이 피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전쟁이 그 요상한 구미호 같은 국화꽃의 탄생을 위해 꼭 있어야만 했던 필수적 과정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문학작품에 대해서도 아부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아리송하고 애매모호하고 몽롱하고 어리둥절한 과찬을 한다. 우리는 이런 아부를 멈추고 정직하게 그리고 아주 쉽게 작자가 말한 대로 가장 가까운 단어 풀이를 해야 한다. 그러면 먹구름과 천둥소리는 곧바로 전쟁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전쟁임을 전연 짐작하지 못한다면 그는 전쟁 영화도 한번 못 봤거나 병역 기피자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힘든 과정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만 했었다면 그 꽃은 참으로 비싼 꽃이다. 그렇지만 존귀한 꽃은 아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처럼 비도덕적인 꽃이며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보들레르를 훨씬 능가하는 잔혹한 악마주의적 꽃이다.

보들레르를 격찬하며 그를 아름다움의 창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킨 가장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말한 서정주는 여기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꼭 같은 시 또는 그 이상으로 악마적 탐미주의 문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화해 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반역행위에 대한 변명이 되니까.

ㄴ.국화가 일본왕인 이유

그러면 그 국화꽃이 왜 일왕 히로히토냐를 말해야 되겠다.

이 시가 발표되던 1947년 당시의 이미지대로 가장 쉽게 받아들이면 일왕 히로히토가 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면 무조건 대한민국이듯이 '국화꽃이 피었습니다.' 했으면 무조건 일왕 히로히토다.

매일 동쪽의 일본 궁성을 향해서 90도 허리 굽히고, 그러다가 떠들기라도 하면 얻어 터져가며 뼈저리게 배운 것이 그것이니까 서정주가 그때 국화꽃이 피었다고 시로 말했으면 무조건 일왕을 연상시켰다고 봐야 한다. 물론 아니라고 말할 노인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식민지시대의 민족적 슬픔을 전연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역사를 잊은 건망증 현상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화 옆에서> 가 발표된 이듬해 1948년에는 일본에서 <국화와 칼>이 출판되어 280만권이 팔렸다. 미국의 여류 인류학자 베네딕트가 정부 측의 부탁으로 쓴 일본 연구서다. 일본에서 그만큼 소동이 일어나니 한국에도 알려지고 지금 젊은 세대들도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책이다.

그만큼 국화가 일본 왕실 또는 일본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이니까 <국화 옆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해석이 따르게 된다. 그런데 왜 이를 부인하며 애매모호하게 고귀한 생명 탄생이라고 추상적인 빈말들을 하는 것일까?

가장 일반적인 반론과 변명은 이런 것이다.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이 국화라는 사실만으로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일본 왕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만일 그런 식의 유추가 가능하다면 다른 모든 문학 속의 국화도 일본 왕이냐고 반문한다.

아마 전국의 장례식장 마다 조문객들이 죽은 자의 영전에 한 송이씩 바치는 국화도 모두 일본 왕이란 말이냐고도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