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북 인명사전’의 양심에 들이대다
‘친북 인명사전’의 양심에 들이대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10.03.2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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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사문난적 규정’의 옹졸함

1623년 3월, 조선의 광해 임금(光海君 · 재위1608~1623)이 쫒겨났다. 능량군을 앞세운 김류 · 김자점 ·이괄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창의문(자하문)을 넘어 창덕궁에서 내응한 군사들과 합류,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집권 15년 째 광해군은  세자시절 임진전란을 수습하고, 군주가 되어선 명 · 청 교체기 국제정세 틈바구니에서 민생안정을 기했으나 허망한 말년을 맞고 말았다. 이 사건을 역사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

광해군의 여러 죄목 중 가장 큰 것은 임진왜란 때 도와 준 어버이 나라 명나라(중국)가 쓰러져 가는데, 은혜를 갚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 나라인 후금(後金, 후일 청나라)과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 뒤 여종 한 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66세로 승하했다.

이후 인조는 꽉 막힌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다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항복의식)의 치욕을 당하고 만다. 나아가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새로운 세상에 눈뜨고 온 자기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주자학적 가치에 기반한 구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680년, 대학자 윤휴(尹? · 1617~1680)가 사약을 받아 죽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게 높은 학문의 경지를 칭송받았던 그였다. 숙종 임금(肅宗 · 재위1674~1720)시절, 사색당파 치열한 정쟁이 한창일 때 윤휴는 <대학>과 <중용>을 해설하면서 주자와 다른 풀이를 했다. 그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며 교조화 된 주류세력에 맞섰다. 그것이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게 했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1959년 진보당 사건도 있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曺奉巖)이 이승만 정권이 북진통일을 주장할 때 홀로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북한과 내통했다며, 사형당한 것이다.

2010년 3월 12일, 백낙청 · 박원순 등 일군의 진보진영 인사들이 ‘친북 인사’로 인명록에 등재됐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지난 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인명사전’을 펴낸 데 대한 보수 우파진영의 대응이다.

이에 앞서 우파 진영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 인명사전의 편파적 · 정파적 시각에 맞서 친일 못지않게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친북행위를 밝히겠다”며 ‘친북 반국가 행위자 인명사전’ 편찬계획을 밝힌 바 있다. 친북인사 선정기준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 북한 측과 같은 주장을 펼친 자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한 자 △의회민주주의와 국가사법체계를 파괴 선동한 자 △북한 사회주의체제 우월성을 찬양 선전한 자 등등이다.

친북 인사로 등재된 인사들 모두가 위의 선정기준에 해당되는 지는 우파 나름의 자료에 근거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 인사들이 광복이후 대한민국을 규정했던 ‘친미반공’ 일변도의 지독한 메카시즘적, 편향적 세계관과 역사관(가치관)에 반대하며 저들의 기득권을 부정 또는 비판한 사람들인 것이다. 감히 주류(보수우파)의 기득권에 대들었다가 주류의 표적이 된 셈이다.

마치 조선시대 명나라(중국)를 세계의 중심, 어버이 나라로 섬기며 주자학적 가치만 최고인양 떠들던 사람들이 그와 다른 견해나 주장을 펼친 소수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운 것과 같은 경우다.

중요한건 조선의 지나친 친중국 · 주자학 일변도의 세계관과 역사관(가치관)은 조선을 구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한민국 보수진영의 지나친 친미반공 · 무한경쟁 ·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역사관(가치관)이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나아가 그것으로 한반도 7천만 전체 민족을 구하고, 진정으로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지는 양심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