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20회
[연재] 딱지 20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10.04.08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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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투쟁위원회(2)

자 그럼 없었던 일로 하고 시작하지요.

이장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맨먼저 해야 할 일은 위원장을 뽑는 겁니다. 그래서 얘긴데요. 저는 다 아시다시피 각계각층에 제자도 많고 여러모로 유능하신 회장님을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을 쪽에서는 아마도 입을 맞춰 가지고 나왔던 모양이다. 상구가 박수를 치며 ?찬성이요? 하고 나서자 연화만 빼고는 다들 박수를 쳤다. 주택 쪽에서도 일제히 박수가 나온 것은 물론이다. 회장한테는 조금 전에 당한 무안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번쯤 사양을 할 법도 했지만 회장은 그런 인사치레같은 건 싹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들 뜻이 정 그렇다면 위원장을 맡지요. 우리 학동 주민들의 운명이 걸린 일이고 또 우리 가족의 앞날이 걸린 일이니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앞장서 싸우겠어요. 여러분들 역시 저와 똑같은 각오로 일치단결해서 투쟁해 주리라 믿습니다.

다시 박수갈채가 터졌다. 이어서 이장이 부위원장을 맡기로 하고 주택 총무 선희가 위원회 총무까지 겸하도록 결정이 났다. 싱거우리만큼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 것이다. 그러자 상구가 형의 눈치를 살피며 한 마디 하고 나섰다.

주민 숫자로 따지면 우리 쪽이 더 많은데 총무까지 주택에서 가져가는 건 좀 불공평한 거 아닙니까?

아니나 다를까 당장 이장의 호통이 떨어졌다.

가져 가긴 뭘 가져 간다고 그래? 우리 동네에서 총무할 사람이 누가 있어? 니가 총무할 거야 그럼? 총무가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무슨 잔소리가 많아?
맞어.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던 정순철이 나섰다.

우리가 시방 위원장이 어쩌고 총무가 어쩌고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여. 꿩 잡는 게 매라고 일 잘 할 사람을 시켜야지. 총무같은 건 여자들이 더 잘 한다고. 우리 남자들은 뒤에서 힘만 쓰면 되는 거여.

투쟁위원회는 그렇게 진용을 갖추었다. 그때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오더니 회관 앞에 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장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알맞게 도착하는군. 자, 그만들 일어나서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제가 한턱 내지요.

회관 앞에는 옆구리에 '부일가든'이라고 쓴 봉고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길자가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어머나, 가든이면 갈비집 아니야? 투쟁위원 하기를 정말 잘 했네.

투쟁위원들은 그날 저녁 갈비와 냉면으로 포식을 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소주를 여자들은 맥주를 마셨다.

자, 보살님 한 잔 드세요.

회장이 연화에게 맥주를 권했다.

아까는 내가 이성을 잃어 가지고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 없었던 일로 합시다.

연화도 회장에게 맥주를 권했다.

교회 나가시는 분한테 술을 권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아이구 맥주가 무슨 술입니까. 우리 예수님도 제자들하고 매일처럼 포도주를 마셨어요. 매일처럼요.

모두들 기분이 좋았다. 막판에 순철이 주정만 하지 않았더라면 2차 3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당신네들같이 땅 있고 집 있는 사람들이야 무슨 수가 나도 나겄지만 나같이 집도 절도 없는 놈은 이판사판이여. 투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막 가는 인생이란 말이여.

순철의 주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순철은 봉천동 산동네에서 재개발 때 쫓겨났다가 다시 서초동 꽃동네에서도 쫓겨나 일산까지 흘러 들어온 떠돌이었다. 그 일산에서도 다시 쫓겨날지 모를 처지가 되었으니 주정이 나올만도 했다.

니기미 씨팔, 이번에도 빈손으로 쫓아내기만 해 봐라. 남포를 한 도라꾸 때려 싣고 청와대로 쳐들어 가서 잡것들 확 날려 버리고 말 것잉게.

돌아오는 길에 미순이 회장한테 물었다.

남포가 뭐예요?
다이나마이트를 옛날에 우리말로 남포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다이나마이트를 한 트럭 싣고 가서…….
꽝 터뜨리겠다 그런 얘기지. 저런 세입자한테도 제발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할 텐데.

그날 밤 미순은 정구의 팔을 끌어다 베면서 나른하게 말했다.

투쟁위원 맡기를 잘 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