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삶의 흔적 따라 걸어볼래요~
정순왕후 삶의 흔적 따라 걸어볼래요~
  • 정지선 기자
  • 승인 2010.04.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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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그리던 동망봉부터 생이별한 영도교까지

17세 나이에 단종을 여읜 정순왕후 송씨. 그의 굴곡진 사연이 굽이굽이 흐르는 흔적을 따라가보자.

동쪽 바라보며 고운 님 그리던 동망봉

동망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하여 유래됐다. 정업원 옛터와 청룡사에서 10분 정도 언덕으로 걸어 올라간다. 숭인1동쪽에서 오솔길로 오르다 보면 정순왕후도 보았음직한 바위들이 거무튀튀한 빛깔을 뛴 채 남아 있다. 산의 양쪽 기슭에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 보문사, 묘각사, 밀인사 등의 사찰이 있다.

동망봉

조선 후기 영조 47년(1771) 임금이 동대문 밖 연미정동(燕眉汀洞)의 정업원에 들렀다가 단종비 송씨 부인의 옛일을 물었다. 전 참판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 주고자 했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했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했다.

영조 임금은 이에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 ‘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광복 후까지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를 깨는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쪼개진 절벽이 흉물스레 남아 있는 산 정상을 공원으로 가꿔 놓았다.

유서깊은 비구니스님들의 도량, 청룡사

옛 정업원 터 부근에 위치한 유서 깊은 비구니 절이다.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 보다 43년후에 세워졌으므로 ‘새절승방’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태조 5년(922) 삼각산 맥의 한 자락인 외청룡 산등성이(낙산마루)에 도선국사의 유훈에 따라 어명으로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조선 건국 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절에 있었고, 1차 왕자의 난 뒤 세자 방석의 누나인 경순공주가 머무르기도 했다. 1405년 무학대사가 태상왕을 한양에 모셔오자 그 사례로 왕사가 머물던 청룡사를 중창케 했다.

연산군 때 폐사된 적도 있으나, 중종 7년(1512)에 법공(法空)이 중창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명을 받은 예순(禮順)이 광해군 때 억울하게 죽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명복을 빌면서 사찰전체를 새로 중창했다. 순조 13년(1813)에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듬해 수인(守仁)과 묘담(妙潭)에 의해 중창, 1823년에 다시 청룡사로 개칭됐다. 1918년과 1932년 상근(詳根)이 중창하였고, 1954년~1960년에 윤호(輪浩)가 중창하였다. 현재의 대웅전은 1973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업원, 임금의 여인들이 모여 살던 여승방

조선시대 한번 궁궐에 들어간 여자들은 죄인으로 쫒겨나거나 죽기 전에는 궁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후궁들도 임금이 일찍 죽어버리면 갈 곳이 마땅찮았다. 아들이 있는 후궁은 늘그막에 아들을 따라 궁밖에 나가 살 방도가 있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여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여인들과 왕실의 과부들을 위해 세워진 절이 바로 정업원이었다.

정업원 터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왕실여인들의 출가 귀의처로 조선 건국후 한양으로 옮겨 도성 안에 있었으며, 세종 30년(1448년) 철폐되었다가 세조 3년(1457)에 복설되었다. 고려 공민왕의 후비 안씨가 정업원의 첫 번째 주지였고, 조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잃은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의 부인이었던 심씨가 두 번째 주지였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도성내 정업원에 들어가지 않고 영월을 바라볼 수 있는 도성 밖 연미정동 청룡사 부근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이 집을 궁궐의 여인이 거처하는 사찰이라는 의미로 ‘정업원’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정순왕후는 출가하여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왕후와 함께 온 일행 5명도 전부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정업원구기」는 1972.5.25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10.30「정업원터」로 명칭 변경됐다.

생계위해 자줏물 옷감 물들이던 자지동천

정순왕후 송씨의 딱한 사정을 동정한 당시의 민심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이 바로 ‘자지동천’(자줏동샘)이다. 왕후 송씨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의 동대문 상인들은 왕후와 그 시녀들에게 옷감에 물들이는 일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한다. 마땅한 생계거리가 없던 왕후였던지라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침 동망산 계곡 곳곳에는 자줏빛을 띠는 풀인 자초(지초, 아어초, 자단)가 많았다. 옷이 닿기만 해도 자줏물이 드는 약초였다.

왕비와 시녀들은 상인들로부터 받은 옷감을 화강암 바위 밑에 흘러나오는 샘물에 빨아 물들인 뒤 그곳 바위들에 널어 말렸다. 예쁜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이 만들어졌다. 왕후와 시녀들은 이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창신 3동과 숭인 1동을 이룬 동망산과 낙산사이 골짜기를 자줏골, 또는 자주동이라 불렀다. 청룡사에서 북쪽 기슭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원각사 옆 화강암 바위 밑에는 지금도 샘물 솟는 우물이 남아 있으며, 옷감을 널어 말렸던 바위엔 ‘紫芝洞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금남의 채소시장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등학교 앞에 ‘여인시장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정순왕후를 동정한 인근의 여인들이 ‘금남의 채소시장’을 열어 왕후에게 신성한 푸성귀와 먹을 거리를 공급하던 역할을 했다는 곳이다. 왕후의 시녀들이 몰래 이곳에 나와 채소를 구하며, 다른 먹을 거리도 구해 갔던 것이다. 왕후를 도우려 한 당시 백성들의 지혜와 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도교,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광진나루와 송파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들어오던 관문에 해당하는 다리였다. 청계천 중 · 하류에 있는 다리로서 백성들의 통행량이 많았다. 영월로 유배가던 단종이 이곳까지 전송나온 정순왕후와 최후의 이별을 한 곳이다. 다시 못 만날 줄을 몰랐던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지켜보았던 백성들이 훗날 ‘영 이별다리’ 또는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다.

영 이별다리로 불리기도 하는 영도교

종로구와 종로 문화관광협의회가 발굴해 현대에 재연한 ‘정순왕후 추모문화제’에서는 특별히 이 다리위에 무대를 마련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과 비애의 생을 견딘 정순왕후를 위한 진혼무를 연출하며, 그들의 마지막 이별 장면을 재연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지금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 때 현대식으로 다시 놓아진 것이다.

서울문화투데이 편집부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