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소통이 흐르는 교실 '클래스'
진정한 소통이 흐르는 교실 '클래스'
  • 임고운 영화칼럼니스트
  • 승인 2010.05.1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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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운 영화칼럼니스트]프랑스의 소설가인 프랑스아 베고도의 실제경험을 버탕으로 한 소설<클래스>를 영화화한 것으로 그동안 프랑스문화의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 내어 현대 프랑스영화의 네오리얼리즘을 만들어 가고 있는 로랑캉테의 영화론(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베일에 가려진 메카니즘을 통해 보여줄수 있다는)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이다.

2008 칸느영화제에서 "관객들을 행복에 빠뜨리면서 동시에 현명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찬사와 함께 숀팬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수상, 21년 동안 잠들어 있던 프랑스영화의 자존심을 회복하며, 상업성영화에 주로 집중해왔던 칸느영화제가 이제는 현실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영화에 주목하고 있음을 입증시키고 있다.

로랑캉테는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인 프랑스아 베고도의 출연뿐만 아니라 실제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을 출연시켜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고 있는데, 여기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교실은 프랑스의 다문화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더 나아가서는 프랑스와 유럽이 안고 있는,예를 들면 사회경제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주민들의 불평등한 대우, 사회로부터의 소외. 그에따른 범죄의 증가등)을 여과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서 관객을 바라보게 하는데 멈추지 않고, 그 시선으로 현실을  고민하게 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프랑스아 마랭은 파리 근교에 있는 중학교에 담임으로  부임하며 3학년 학생들과 첫 만남을 갖는다. 아프리카와 아랍, 아시아등지에서 이민 온  학생들은 수업에 취미가 없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그 중 가장 모범생인 중국학생 웨이마저도 부모님의 불법체류로 추방위기에 몰려있다. 학교에서  골칫거리의 주인공인 문제아 슐레이만은 수업 중 껌을 씹어데기 일쑤고 마랭에게 "당신"이라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이일 저일 참견을 안하고는 못배기는 에스매랄다,또박 또박한 발음을 갖고 있는 조숙한 여학생 쿰바,전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전학 온 칼, 예쁜 모범생 루이즈 등, 원래 영화 제목인<벽 사이에서>처럼 학생들 서로간에 놓여 진 벽도 만만치 않다. 전혀 조율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교실에서 의외로 이들은  나름대로의 균형과 질서를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던 칼은 학교생활에 조용히  적응해 가고 에스메랄다는 선생님의 실수로 던진 한마디에 분노하며, 반아이들을 동원해 마랭에게 책임을 묻는다.

프랑스에서 6년간 공부하고 생할해 온 필자의 눈에 비친 영화 <클래스>의 단편들은 영화인지 다큐인지 구분이 안될만큼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10여년간 프랑스 사회의 이면을 다루어 온 로랑캉테의 예리함이 놀랍고 감탄스럽기만 하다.

필자 역시 파리에서 공부를 할때는 아시아에서 온 여학생이라는 편견이 따라다녔고,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다가 느닷없이 "do you speak english?"하며 천연덕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친구도 있었는가 하면,  왜 그머언 나라에 와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도 적지않았다. 안타까운 시선을 그대로 노출시킨 채 말이다. 심지어는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 이제 한국 전쟁은 끝났니?"하고 물어 올 정도였다.

20세기 중반까지 제국주의를 누렸던  프랑스이기에 다른 나라에 대한 무관심이 창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여전히 궁금해지는 것중의 하나다.

이유없이 반항하는 아이들과 열띤 토론을 통해 아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는 마랭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수업방식은 프랑스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실 풍경이다. 지금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로랑캉테의 아들이 <클래스>를 보고나서 아빠영화 중 최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제  파리 19구의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던 프랑스아 베고도의 "흔들리는 교단, 방황하는 아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수업철학과 학생들에 대한  열린 사랑은 아이들의 솔직한 일기 낭독과 전시를 통해 대립과 충돌이 아닌 이해와 설득의 세계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적과 성격으로 별표를 매기고, 선생님에게 끝없이 대드는 아이들에게 해서는 안될 욕설을 하는 마랭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분노보다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학교라는 사회가 교사를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인간으로 붙들어 두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속물이란 어원도 따지고 보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 (s.nob)라고 적어놓은 데서  비롯된 것인데 속물이라는 단어가 영국의 철도처럼 퍼져나가면서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 하는 사람을 일컫게 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버텨내야 한다는 의미임을  마랭의 속물적인 근성을 통해 미리 학생들에게 예고해 준 셈이다.

주입과 강요만이 넘쳐나는 한국의 중학교 교실에도 토론과 소통이 집중된다면 아이들도 더 많이 웃게 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학교, 그리고 교육,10대들에 대해 많은 부분을 잘 모르면서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왜곡된 편견 탓이다.

한단어와 시제를 가지고  열정적인 토론으로 이끌어 내는 마랭의 열정은  한창 성장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때로는 "제가 과거분사  대신 현재형을 쓰는게 사는데 중요한가요?"하며 시니컬한 반응으로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기도 하지만 마랭은 끝까지 대화의 타협점을 찾아가도록 유도한다.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친구에게 sms를 보내면서 단어하나를 잘못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친구도 마랭처럼 내 실수에 대한 해명을 다섯줄이상 읽고나서야  오해를 풀었다.  프랑스인들의 언어에 대한 애정이나 집요함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을 계기로 불어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 학생들과 선생님이 함께 웃으며 축구를 하는 모습은 거시적의미에서  아름다운 유럽공동체를 향한 프랑스의 염원의 상징이자, 평화와 화합을 꿈꾸는 모든 세계의 희망이다.

두고 두고 보면서 음미하고 싶은 영화. 오랜만에 진심으로 와 닿는 기분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