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장 권응수를 아십니까
의병대장 권응수를 아십니까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10.05.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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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경상좌도 의병활동 주목받아야

임진전란사에서 권응수(權應銖 ? 1546~1608)의 존재는 독특하다. 그는 전란초기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었으나 박홍이 싸우지 않고 도망가 버리자 군대해체의 비애를 안고 고향인 신녕(경상좌도 신녕현=지금의 경북 영천시)에 돌아 왔다. 그가 고향에 왔을 때 고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가족들이 피난해 있던 보현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생 응전(應銓) 응평(應平) 응생(應生)과 아들 우(遇)와 적(迪), 노복들까지 모두 12명으로 최초의 의병대를 조직했다. 조촐하기 짝이 없는 의병대였다. 그는 보현산을 내려오며 개울가 외나무 다리에서 의병을 훈련시켰다. 눈을 감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게 한 것이다. 평지 길도 눈 감고는 걷기 힘든 법. 외나무 다리에서 눈을 감은 의병대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그는 의병들에게 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봉사와 눈이 밝은 아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노?”
“당연히 눈 밝은 아이가 이기지예~”
“아이가 눈 봉사 어른을 이기는 방법은 뭐겠노?”
“잡히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가며 때리면 결국 눈 봉사 어른이 무너지지예~”
“바로 그거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지만 저들은 이 땅에서 눈 뜬 장님과 같다. 우리는 이 땅 구석구석을 잘 안다. 우리가 저들 눈에 띄지 않게 매복해 싸운다면 적은 숫자로도 큰 숫자를 이길 수 있다.”

그는 훈련되지 않은 적은 군대로 정규 왜군을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유격 게릴라전에 밝은 병법의 명수였다. 중리(경북 영천시 화남면 금호동, 당시는 송괴정) 집으로 의병대를 인솔한 그는 마을 집집마다 버리고 간 옷감을 모아 깃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 앞 영천으로 통하는 바걸재 산마루 여기저기에 걸어 상당히 많은 군사들이 진을 친 것 처럼 위장했다.

당시 왜군이 이미 영천성을 점거하고 노략질을 시작했던지라 그들의 진격을 늦추며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그의 작전은 주효했다. 왜군들은 쉽게 바걸재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삼창 한천 쪽으로 들어왔다. 그곳은 붕어듬(일명 어류산 : 물고기 노니는 산)아래로 물이 많고 늪지대가 발달해 대규모 군사가 움직이기 불편한 곳이었다. 권응수는 그곳에서 왜군을 기다렸다. 지리에 밝은 토박이 의병장의 함정이었다.

마침내 5월 6일. 왜군 수 십 명이 바걸재를 피해 사천 대천 삼창 고현과 현고 쪽을 훑으며 노략질한 조선 막사발(왜군들은 이것을 귀히 여겼다) 자루들을 메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왜군 행렬이 물 가운데에 몰렸을 때 붕어듬 숲에서 화살이 빗발쳤다. 권응수가 쏜 편전(片箭)으로 한꺼번에 세 사람을 꿰뚫는다는 화살이었다.

이때 이미 권응수 진영에는 인근 대천마을 출신의 용장 이온수(李蘊秀)와 정응거(丁應?), 사위 조축(曺?), 화동 출신의 매제 성훈(成勳), 육촌아우 권응심(權應心)을 비롯한 재종반 형제들, 영천선비 정담(鄭湛), 정천리(鄭千里), 둘도 없는 벗 김몽구(金夢龜), 조종악(趙宗岳), 사천출신 이득정 (李得禎)등도 합세하고 있었다. 의병군은 불시에 습격당한 왜군들을 마음껏 도륙했다.

이것이 바로 임진전란사상 경상좌도에서 벌어진 첫 승전으로 유명한 대동 한천전이다. 사기가 충천해진 의병군은 왜군들의 시체를 중리마을 입구 한골 웅덩이 둔덕에 묻고 그 목을 내다 걸었다. 우리도 왜군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소문이란 원래 뻥튀기기가 되는 법. 권응수 혼자서 왜놈 백 명을 해치웠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산속에 피난했던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권응수는 장정들을 구마리(鷗馬里 말을 달리는 동네) 강변에서 훈련시켰다. 그가 20대 때 유씨 부인 처갓집에서 전수한 무예를 익히며 말을 달리던 강변이었다.

약 백 여명에 달했던 이 초기의병들은 구마리에서의 훈련과 여러 곳 전투를 겪으며 점차 정예화 되어 군세를 떨쳤다. 그 해 7월 27일 전국 최초로 빼앗긴 성을 되찾은 ‘영천성 탈환전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권응수는 이후 경주성 탈환전, 대구 공산성 전투, 안동 모은루 전투, 문경 당교 전투, 산양전투, 밀양성 전투, 울산성 전투 등 수 십여 차례 전투에서 적을 무찔러 경상좌도를 평정했다. 적들은 그를 몹시 두려워 하여 그의 군대를 피하려 했다. 후일 백사 이항복(李恒福)은 그를 평해 “해전에선 이순신, 육전에선 권응수”라고 했다.

경상북도와 영천시는 이에 최근 매년 5월 6일 권응수와 그의 초기 의병 백여명을 기념해 고향 언덕에 ‘백의사’(百義祠)를 짓고 제향을 지낸다. 권응수는 사후 충의공(忠毅公) 시호와 화산군(花山君) 봉호를 받았다.

아쉬운 건 영천성 탈환전투에서 권응수를 기꺼이 총 대장으로 추대해 성공적 전투의 밑받침이 되며, 함께 싸웠던 영천 의병장 정대임, 정세아, 자인 의병장 최문병, 경산 의병장 최대기, 의흥 의병장 홍천뢰, 하양 의병장 신해, 경주 선비 최진립(경주 최부자 집 선조) 등 여러 훌륭한 어르신들과 3,900여명 병사 모두를 함께 향사하지 못하는 점이다.

경상북도와 영천시, 그리고 정부 당국자와 학계는 임란구국의 원천이 되었던 경상좌도 의병 활동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